문화 문화일반

[이환주의 아트살롱] 김어준의 보스 양복과 예술교육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3.23 05:00

수정 2023.03.23 17:25

김어준은 과거 한 강연에서 청년들에게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 출처=유튜브 마이크임팩트 채널
김어준은 과거 한 강연에서 청년들에게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 출처=유튜브 마이크임팩트 채널

[파이낸셜뉴스] 2000년대 초반 다니던 대학교의 야외 강연장에서 우연히 김어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김어준은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다 우연히 프랑스의 명품 매장에서 한 양복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양복과 함께 구두, 셔츠, 넥타이도 입어본다. 가격은 모두 120만원. 그의 수중엔 딱 120만원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 2만원씩 쓰면 60일을 버틸 수 있는 그 돈으로 양복을 샀다.
바로 지금 그 양복을 사지 않으면 '앞으로 절대로 지금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0년, 20년이 지나 돈이 충분해 졌을 때 그 양복을 사면 늦는다,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 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충격적이었던 김어준의 보스 강연

김어준의 강연 이후 몇 년쯤지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되고 힘든 삶을 사는 청년들에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위로와 격려를 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몇 년이 지나자 인기가 사그라 들었다. 청년 세대에게 지금의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미래에는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것 같이 말한 어른의 충고는 청년들의 공감을 오래도록 얻지 못했다.

매년 7~9% 경제가 성장하는 고도성장기, 아픔을 참으면 취업과 자산형성이라는 보상이 어느정도 자연스러웠던 과거의 그들과 지금의 청년은 처한 상황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위로를 건넨 그 세대는 우리나라의 이토록 빠른 고령화와 국민연금의 고갈 같은 것은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 20대로 2000년 초반을 지나며 나름의 행복론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축하지 마라. '행복은행'은 이자를 주지 않는다. 아니, 행복은행의 금리는 오히려 마이너스다’라는 것이었다.

다시 김어준의 강연으로 돌아가보자.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김어준은 사족으로 보스 양복의 멋짐을 한눈에 알아본 경위도 세세히 설명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처음 보면 일반인이 그 아름다움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스의 양복은 예술적 심미안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알 수 있는 멋짐이 있었다. 미술사에 길이길이 남을 '고전'의 아름다움을 한 번에 알아볼 정도로 훈련이 되지 않은 그라도 명품 양복이 가진 멋짐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책 내용 中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책 내용 中

■아는 만큼 보인다, 알면 사랑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오랜시간 "알면 사랑한다"는 철학을 강조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많이 알고 많이 보일 수록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더 발견하고 결국에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래 바라보면서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먼저 잘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2013년 5월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 행사' 개막식 특별 강연에서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삶'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그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 예술가로 태어나지만 곧 학생, 노동자로 훈육되면서 살아간다.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게된다. 어린 아이들은 태어날때부터 예술가다. 글을 모르고 공부를 안해도 그림을 그리고 소꿉놀이를 한다. 소꿉놀이는 최초의 연극이고, 아이들이 최초로 거짓말을 하는 순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내는 것,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예술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점수로 매겨지는 일, 강제로 훈련하는 일을 하면서 어린 예술가들의 내면에는 작은 예술가가 사라진다. (중략) 한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예술을 하지 말아야할 수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한 가지 이유가 그 사람을 예술가로 만든다."

김영하 작가는 과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특강에서 "우리 모두는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 이미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채널 캡처
김영하 작가는 과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특강에서 "우리 모두는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 이미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채널 캡처

대학시절 공지영 작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한 학생이 "문학(예술)의 역할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공지영은 취재를 위해 방문했던 유아, 어린이 정신병동의 일화를 소개해줬다.

공지영이 방문했던 곳에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영어 비디오를 들으며 태교를 한 예닐곱살 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마치 미국 현지인 아이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동자와 마음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영어유치원, 집 등 한정된 곳에서 훈육된 아이는 다른 아이처럼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자신의 예측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제대로 감정을 처리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제대로된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었다.

공지영은 "문학의 역할이란, 글을 통해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을 기르는 훈련"이라고 말했다.

■박은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 인터뷰

서두에 이렇게 길게 김어준, 최재천, 김영하, 공지영 등의 일화를 나열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모든 아이들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적어도 그 씨앗이 말라서 죽어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물을 줘야하지 않을까.

지난 8일, 박은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을 만나 9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피지 않은 어린 예술가들에게 물을 주는 기관이다.

박은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 사진=김범석 기자
박은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 사진=김범석 기자

▲기관 및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서울대에서 미술학사(1988년)와 도시공학 박사(2014년)를, 시카고예술대에서 미술학 석사(1997년)를 전공하고 수십년 동안 문화예술경영 분야에 몸담아 왔다. 2000년도에 추계예술대에 한국 최초로 예술경영대학원을 만들었다. 앞선 정부들을 거치며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균형발전위원회, 창조 지역사업 등 학계는 물론 여러 정책에도 관여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2005년 설립된 문체부 산하기관으로 문화예술교육관련 모든 정책의 집행과 실행을 하는 곳이다.

▲진흥원의 주요 사업은?
-크게 학교 지원사업과 학교밖 문화예술교육관련 지원사업으로 나뉜다. 연극, 무용, 국악, 만화, 애니메이션 등 8개 분야 예술 강사를 학교에 파견해 방과 후 교육 등을 진행한다. 1년 예산이 약 1300억원 정도인데 이중 70%가 학교예술강사 사업에 쓰인다. 나머지는 사회문화예술교육으로 문화예술 향유 기회가 적은 지역과 소외계층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지원한다.



▲늘봄학교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현재 우리 교육은 입시 위주로 편성돼 있는데 예술 교육은 어리면 어릴수록 그 효과가 큰 것으로 많은 연구가 밝혀졌다. 최근 정부는 영유아 보육을 교육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늘봄학교 정책을 추진 중이다. 단순히 방과 후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넘어 문화예술교육등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올해는 늘봄학교 연계 학교문화예술교육 다각화 '예술로 링크' 사업 중 1개 지역을 시범 운영한다. 내년에는 신규예산을 확보해 총 17개지역 51개 교육지원청을 연계해 올해 7개교에서 357개교로 늘리는 것이 목표다.

▲자랑할 만한 다른 사업들이 있나?
-지난 2010년 시작한 '꿈의 오케스트'라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꿈의 댄스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꿈의 오케스트라'는 취약계층 아동, 청소년 등에게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악기 지원, 교육을 거쳐 오케스트라 연주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올해는 총 51개 거점기관에서 사업이 진행된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도 EBS에서 방송된 '꿈의 오케스트라'를 언급하며 '약자 프렌들리' 예술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꿈의 댄스팀'은 창작무용을 중심으로 창작 공연 경험을 통한 전인적 성장을 목표로 올해 전국 20개 지역에서 본격 추진된다. 예술꽃 씨앗학교 사업을 통해서는 취약계층에 대한 문화예술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술꽃 씨앗학교는 전교생 400명 이하의 문화 소외지역의 작은 학교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최대 5년간 지원하는 사업이다.

▲앞으로 추진하고 싶은 사업이 더 있나?
-지역 대학과 문체부 장관이 지정하는 지역의 재단 광역센터들과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관련 협업을 진행하고 싶다. 이들 기관과 협력 체계를 구축해 기본 계획이 나오면 함께 실행해야하는데 예산 확보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는 국고가 130억원, 지방비가 매칭되면 200억원 수준인데 부족하다.

▲지난 2월 문체부와 '제1회 미래 문화예술교육 포럼'을 개최했다. 향후 2회 포럼도 계획 중인가?
-5월 넷째주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에 맞춰 2회 포럼을 열고 여기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AI와 창의성, 문화예술교육의 역할, AI윤리와 디지털 저작권, 디지털 격차 해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공론화할 예정이다. 올해 말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문화예술교육 대회'에도 미래 문화예술교육 국제 아젠다에 대한 의견을 적극 나눌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통해 배출된 학교 예술강사가 5100명에 달하고, 지금껏 만든 교육프로그램만 1000개가 넘는다. 온라인 교육을 통해 장애인, 문화 취약지역에서도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고 이를 확산할 예정이다.
향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우수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K-문화예술교육을 세계로 수출하고 싶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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