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이희경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나용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0)을, 황기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5)을 각각 추서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이듬해 11월 종전 후 김규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을 맡아 '통신전'(유럽 언론과 각국 대표·저명인사에 송부하기 위해 만든 안내문)을 발행해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미국으로 복귀한 후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침략과 통치 실상을 알렸고 그해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보고했다.
선생은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돼 프랑스와 영국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해 10월 영국의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 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1년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 수상회의에서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일본대사에게도 보냈다. 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했으며, '일영동맹(日英同盟) 반대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으며, 이듬해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선생은 이후 뉴욕과 런던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보훈처는 황기환 선생 유해를 순국 100년이 되는 다음 달 국립묘지로 봉환할 예정이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 1919년 7월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이후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1922년 러시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1922년 2월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관한 사항을 준비하는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돼 그해 5월 김철 등과 함께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생은 광복 이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1984년 서거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그해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다.
선생은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계 확립에 노력했으며 간호원 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해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모은 의연금을 상하이 임시정부 본부로 송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 동양시찰단'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펼쳤다. 1921년 안공근과 함께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러시아의 독립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기도 했다.
선생은 1937년 국내로 귀국해 호흡기 전문의로 일하다 1941년 별세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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