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동규 기자 = #. 드디어 그날이 왔다. 2000여개 계좌의 지난 1년치 입출금 내역 분석을 끝낸 후 이제 확실한 증거만 확보하면 되는 날. 강력반 경찰 35명과 소방관 10명은 지난해 8월의 어느 날 서울 강서구의 한 빌딩 최고층에 위치한 보드카페(홀덤펍)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예상대로 보드카페 안에 있던 10여명의 피의자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소방관들이 문을 강제로 개방했다. 강력반 경찰은 5인 1조로 순식간에 현장을 정리하고, 피의자들을 분리한 뒤 필요한 압수물들을 챙겼다. 45명이 한 번에 들이닥치자 피의자들은 별 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다.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팀 노영환 경사(39)는 보드카페에 불법 도박장을 개설해 운영한 일당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던 날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회고했다. 노 경사는 강력팀원들과 보드카페 내 불법 도박장을 개설하고 범죄단체를 조직한 피의자와 상습도박자 등 총75명을 검거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진했다.
노 경사와 팀원들은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1년 간 2000여개의 계좌를 분석해 불법도박 자금이 오간 루트를 파악하고, 잠복근무와 상습도박자의 진술 등을 통해 가장 마지막 관문인 물증 확보에 성공했다.
노 경사는 지난해 8월 압수수색 집행 후 7개월 동안 수사를 이어가 현재까지 총 75명을 검거했다. 이 중 업주 A씨, 환전책 B씨, 상습도박자 2명을 구속 송치했다.
◇'누가 봐도 불법 도박'…문제는 물증 확보
30대·40대 어른들이 야심한 밤에 한 보드카페에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면서 칩을 주고받는 모습.
노 경사는 "이런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불법 도박이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강서서 강력팀은 제보를 통해 확인한 특정 계좌로부터 파생된 2000여개의 계좌의 2021년 8월부터 2022년 8월까지 내역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 중 불법도박 자금이 오간 것으로 의심되는 계좌를 추리고, 제보자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했다.
노 경사는 "칩이나 현금, 게임머니, 카드, 장부 등을 확보해야 수사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어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기까지 수개월간 공을 들였다"며 "이런 이유에서 지난해 8월 홀덤펍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압수수색을 통해 칩 수천개, 카드 세트 수백벌, 현장장부 등을 입수했다.
적기에 압수수색을 집행하기 위해서도 공을 들였다. 제보자의 진술을 통해 특정 요일 특정 시간대에 보드카페에 손님들이 많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때로는 직접 앞에서 몇시간씩 지켜보기도 했다.
◇"나 그냥 부루마블하러 왔어요"…황당한 변명
"도박이 아니라 밤에 그냥 젠가나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하러 왔어요."
노 경사가 검거한 한 40대 불법도박 피의자의 말이다. 노 경사는 이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노 경사는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거짓진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불법도박 피의자 중에 돈을 크게 잃은 사람들의 진술이 중요하다"며 "황당한 변명을 하는 사람도 많아서 확실한 물증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변명은 황당했지만 불법도박 참여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픈채팅방을 통해 관계자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도박에 관심을 표하면, 이 관계자가 일명 '뱅커'라고 불리는 사람을 소개해 준다. 그러면 뱅커가 특정 계좌를 알려주고 안내에 따라 현금을 입금한다. 현금을 입금하면 그에 상응하는 칩을 뱅커로부터 받아 그 칩으로 카드게임 등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 칩을 따면 그에 상응하는 현금을 계좌로 넣어준다.
이런 이유에서 불법도박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계좌내역과 장부 등의 확보가 중요하다. 노 경사는 "점점 치밀해지는 일당들이 장부도 하루만 적어놓고 파기하는 방식으로 단속을 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압수물을 토대로 피의자들의 진술을 받아내는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도박 피의자들은 자신들이 진실을 말해버리면 좋아하는 도박을 더이상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입을 잘 열지 않았다. 업주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하나의 카르텔처럼 경제적 이익으로 뭉쳐 있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노 경사를 비롯한 강력팀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겼다. 노 경사는 "끝까지 가보자는 분위기가 팀장부터 팀원들 사이에 가득했다"며 "장부와 계좌거래내역과 같은 철저한 물증을 바탕으로 한 집요한 조사로 10명, 20명, 30명 등으로 점점 조사 대상자를 늘려 나갔고, 결국은 이것이 75명 검거까지 갔다"고 말했다. 강력팀은 이런 집요한 수사로 총 8회에 걸쳐 피의자들을 꾸준하게 송치했다.
◇"그냥 해야할 일 하는 것…항상 배우면서 일한다"
노 경사는 지난 2012년 순경공채로 경찰의 길에 들어섰다. 올해로 12년차를 맞이해 베테랑 경찰에 접어들었음에도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고 자신을 낮췄다. 또 가족같은 팀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되지만 사건이 해결되기 직전 범죄자들로부터 보였던 작은 균열이 일순간에 터질 때 희열을 느낀다"며 "사실 왜 경찰이 됐냐는 말에 멋진 대답보다는 그냥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밝혔다.
강력팀 형사로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는 "정보부서, 기동대, 행정부서 등 여러 부서를 있어봤는데 언제나 배워야 하고 수사를 할 때는 정말 꼼꼼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매번 느끼고 있다"며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서 계속 강력형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