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신비화된 관료주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5.08 18:35

수정 2023.05.08 18:35

[강남시선] 신비화된 관료주의
나치전범자인 아이히만은 공무원으로서 성실한 아버지이자 주어진 책무를 완수한 죄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죄는 여기서 지워지고 법정에서의 공방은 죄와 형벌이라는 구도에 집착해 학살의 동기와 목적을 은폐한다.

공직자가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 자체가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회자될 만큼 악은 특별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모습을 취한다.

죄와 벌을 하나로 묶는 구속력을 가리키기 위해 로마인들은 넥수스(nexu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넥수스는 만인 앞에서 선언하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구속력을 뜻하는 '매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선언하는 사람의 말은 곧 법적 효력의 발생과 일치한다. 법을 언급하는 사람에게는 의무가 발생하고,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인간은 말의 존재다. 말은 일단 선언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말의 선언으로 야기되는 죄의 고백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때 '관료주의적 신비'라는 요상한 현상이 출몰한다. 관료주의적 신비는 대개 언어적 존재인 인류 진화에 대한 극단적 형태의 기억, 인간이 말을 하고 언어에 종속되는 까마득한 과정의 기억이라고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주장한다.

결백과 무고를 주장하는 일이 악의 평범성 속에 길들여질 때 어떤 재난이나 참사 속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권한과 책임, 주어진 임무에 대한 수행을 기준으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것은 아이히만의 기만적 논리이자 관료주의의 상투적 관행이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이태원 참사의 통화내용을 기록한 재난안전통신망 기록을 삭제했다고 알려지면서 논란이 거세다. 3개월이 지난 통신기록은 삭제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랐을 뿐이라는 행안부의 주장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아이히만의 주장과 다를 게 없다. 설사 규정이 그렇더라도 사안의 중대성과 파급력,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감안해볼 때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행안부는 백업시스템에 이를 보존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과 세월호 간 교신은 영구보존기록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탄핵심판에 대한 헌법 판결을 앞둔 시점에서 불거진 이번 사태는 본질적으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현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런 상황과 무관하게 이 장관에 대한 부처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물론 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에 대응하는 방식이 일반 국민의 정서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감안하면 편향된 집단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권한만 누리려 하고 책임은 외면하려는 리더의 자세가 부처 전체의 정체성과 자율성, 책임성을 지워버리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ktitk@fnnews.com 김태경 전국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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