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미국의 수출 규제를 받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올해 1·4분기 실적 악화를 겪으며 인재와 기술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에 '초격차' 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의 임직원들이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수백억원의 연봉을 제시하며 국내 연구진에게 접근해 기술 탈취에 이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현지 중국 사업장 앞에서 '뻗치기'를 하며 스카우트를 하는 등 그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미래 산업으로 미중 간 기술 경쟁의 전장이 확대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이후 5년간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국내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93건으로 피해액은 25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중국 공장 앞서 '뻗치기'까지
"직접 통근시간에 맞춰 한국 반도체 공장 게이트 앞에서 기다려요. 퇴근하는 엔지니어에게 말을 걸어 '잠시 동안 우리 생산라인에 와서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보수는 넉넉히 주겠다'는 식으로 현장 스카우트를 시도해요. 자주 찾는 공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 TSMC의 공장인데, 외국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 사옥에도 가요."
20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중국 반도체 기업 간부 A씨의 말을 빌려 최근 미국의 거듭된 대(對)중국 제재로 인력난과 기술난에 시달리는 중국 반도체 업체의 '궁여지책'을 소개했다.
FT는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의 대중국 제재로 미국 인재 빼내기가 어려워지며 궁여지책으로 중국 현지의 한국 기업 엔지니어로 타깃을 옮겼다고 분석했다. 과거 중국의 해외 인력 영입 방식은 주로 미국 기업에서 근무하는 중국계 또는 중국인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으나 미국서 고용됐거나 교육받은 인력을 영입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지면서 한국, 일본, 대만의 엔지니어가 주요 타깃으로 새롭게 부상했다.
FT는 중국 기업 간부가 직접 반도체 공장 앞에서 현장 채용을 하는 수법부터 이른바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는 등 기상천외한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재취업 제한' 내규를 두고 있다. 이를 간파한 중국 기업들은 반도체와 무관한 명칭의 페이퍼컴퍼니에 한국 엔지니어를 취업시킨 후 재취업 기간 제한이 풀리면 정식 채용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작년 버텼지만...1분기 실적폭탄 맞은 中 반도체
중국 반도체 업체의 이 같은 기술탈취 시도는 미국의 제재로 인한 중국 반도체 업계의 불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진 데 따른 기업들의 궁여지책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앞서 지난해 10월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nm 이하 로직 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내용의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한국 기업의 낸드플래시 경쟁상대로 꼽히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심자외선(DUV),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반도체 개발에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 수급도 힘들어지며 기술 개발에 차질을 겪고 있다.
YMTC는 공급망 차질 속에 올 들어 직원의 10%를 감원하고, 올해 예정된 우한2공장 완공도 연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외에도 중국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업계에 약 2조3000억원의 보조금을 투입했으나 5746개의 중국 반도체 기업이 폐업했다. 이는 전년보다 68%나 증가한 수치다.
미국의 제재에도 지난해 호실적을 거둔 중국 파운드리업체 SMIC도 1·4분기 미국 제재의 직격탄을 맞았다. SMIC는 지난주 1·4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20.6% 급감한 14억6000만달러(약 2조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은 1년 전보다 48.3% 급감한 2억3110만달러(약 3070억원)에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에 기술유출 방식은 진화
반도체에서 시작된 중국 업체들의 국내 기업 및 기술 탈취 시도는 미국이 대중국 제재의 전선 확대를 고심하는 가운데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까지 확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국내 산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검찰청 '기술유출 범죄 양형 기준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015~2020년 산업기밀 유출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835건 중 집행유예 301건(36%), 무죄 191건(22.87%) 등이 절반을 넘으며 '솜방망이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이들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크웹을 사용하는 등 수법이 점점 고도화하고 있다. 기술 유출 국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국내 산업계와 경쟁하는 중국 기업이 대다수일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의 전직 연구원 등 7명이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세메스의 영업 기밀인 반도체 습식 세정장비 제작 기술 등을 부정 사용해 장비 24대의 설계도면을 만든 뒤 이를 이용해 710억원 상당의 장비 14대를 제작했다. 이 기술은 기판 손상을 최소화하는 차세대 기술로,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정한 국가 핵심기술이다. 이들은 중국 경쟁업체 또는 중국 반도체 연구소에 수출한 혐의로 기소됐다.
2018년에는 스마트폰 화면 모서리를 휘어진 형태로 구현한 삼성디스플레이 엣지 패널 기술이 협력업체 직원에 의해 중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일반 형사 사건 무죄율(3%)보다 매우 높은 무죄율을 문제 삼으며 양형기준 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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