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정말 영광이라고 밖에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디즈니·픽사 최초 한국계 애니메이션 감독, 피터 손이 하늘로 떠난 부모에게 바치는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 개봉을 앞두고 벅찬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엘리멘탈’은 지난 27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76회 칸영화제 폐막작에 선정돼 프랑스 칸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다음달 14일 국내 개봉을 앞뒀다.
칸에서 부모의 고향인 한국으로 넘어온 그는 30일 열린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우선 우리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두 분께서 하늘 나라로 가셨다”며 “부모님이 제게 보여준 모든 사랑을 이 영화에 담아냈기 때문에 정말 남다른 느낌이다.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라며 감격해했다.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을 담당한 이채연 애니메이터 또한 “아무래도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 (이민자인) 제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라며 “이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손 감독님과 함께 한국에 와 있다는 게 굉장히 영광스럽고 마냥 설렌다”라고 말했다.
■ 서로 상극인 불의 여자와 물의 남자의 러브 스토리
‘엘리멘탈’은 불, 물, 공기, 흙 4원소를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만들어 기존에 보지 못한 독특한 캐릭터와 새로운 비주얼로 시각적 즐거움을 안긴다. 또 서로 상극인 불의 여자와 물의 남자의 러브 스토리라니, 이보다 기발할 수 없다.
서로를 죽이는(?) 속성 때문에 행여 몸이라도 닿을까봐 조마조마한데, 예측불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서로 손을 잡게 된 순간, 흐뭇한 미소와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영화에서 구현한 가상 도시, '엘리멘트 시티'는 마치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처럼 불, 물, 공기, 흙의 속성을 지닌 다인종이 어우러져 산다. 이민자 구역인 파이어타운에 사는 정열적인 불의 여자 '앰버'는 이민 2세대로 아버지가 평생을 꾸린 잡화점을 이어받으려 고군분투한다.
화려한 고층빌딩이 밀집한 시내 중심가에 사는 물의 남자 웨이드는 느긋하고 감성이 풍부한 인물로 곤란에 처한 엠버를 도와주다 사랑에 빠진다.
‘엘리멘탈’은 부모와 자식 세대의 갈등을 중심 축으로 서로 상극인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부모와 자식, 남녀의 사랑 그리고 다양성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남녀 주인공이 거주하는 도시 풍경이 다르고, 이민자인 앰버가 특정 구역에 출입하지 못하는 등 차별을 당하는 에피소드도 있지만, 이 작품은 아시아인 차별과 혐오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풍요로운 도시 풍경을 보여주며 포용과 화합의 가치에 방점을 찍는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이민 2세대 엠버의 성장도 눈에 띈다. 실제로 장남이라 극중 앰버처럼 아버지의 식료품 가게를 이어 받을 뻔 했다는 손 감독은 처음에는 자신의 진로에 대한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손 감독은 "공부는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는 나를 많이 혼내셨다"며 "그러다 아버지께서 가게 손님으로 온 애니메이션 종사자에게 업계 연봉을 물어본 뒤 내 길을 지지해줬다"라고 말했다.
예술적 재능은 모친에게 물려받았다. 손 감독은 "1945년생인 어머니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던 과거 한국에서 딸로 태어난 죄로) 재능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했다. 모친에게 예술은 아들을 먼저 챙긴 외할머니의 행동으로 한국전쟁 당시 다리에 입었던 깊은 상처와 같아 특히나 반대가 심했다고.
■ 다양한 문화적 배경 지닌 감독의 개인사, 픽사의 경쟁력
픽사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감독의 개인사에서 독창적 스토리를 뽑아내는 경우가 많다. '엘리멘탈' 역시 마찬가지다.
손 감독은 (자신의 첫 연출작) ‘굿다이노’(2016) 개봉 당시 제가 나고 자란 뉴욕에 초청돼 무대 인사를 한 적이 있다"며 "그때 무대 위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부모님과 남동생을 보는데,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울었던 적이 있다"고 돌이켰다.
"그때 부모님의 희생과 고생에 감사해하며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후 회사로 돌아와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프로듀서와 동료들이 그 이야기를 내 영화로 만들라고 조언했죠. 그게 '엘리멘탈'의 시작입니다."
손 감독의 부모는 1960대 말~197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왔다. "부모님이 식료품 가게를 했는데, 외국인 혐오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죠. 당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어요. 아버지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 영어가 서툰데도 손님들의 욕구를 금방 이해하고 필요한 것을 찾아주셨죠. 그런 공감 능력과 다양성의 가치를 피부로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이민 세대로서 겪었던 차별의 경험도 녹아 있다. 그는 "차별의 경험은 물론 싫고 불쾌했다"면서도 "하지만 나를 더 잘 이해할수 있는 계기가 됐다"라고 돌이켰다.
"차별을 겪게 되면 처음에는 놀라죠. 또 굉장히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제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가, 좀 더 나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라고 부연했다.
"저는 100% 한국인의 피를 가졌지만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얼만큼이 내가 한국적이고 얼만큼이 내가 미국적인가, 어떤 것들이 나를 나로 만드는 원소일까? 그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제가 저를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물론 싫죠. 불쾌합니다. 하지만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손 감독은 타인의 딱한 사정에 귀기울이고, 감성이 풍부한 웨이드처럼 자신 역시 눈물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열정적이면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앰버는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이 또한 부모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살고 싶었던 손 감독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앰버는 웨이드의 투명한 몸을 통해 자신을 마주한다.뒤늦게 자신의 재능도 알게 된 그는 말한다. "난 지금까지 한번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부모의 희생을 보고 자란 이민 2, 3세대의 부채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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