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집에서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동료 여직원을 내연 관계가 들킬까봐 제 때 구호하지 않았다가 사망케한 전직 국토연구원 부원장에게 살인죄가 확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9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2019년 8월 자신이 거주하는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은 후배 직원 B씨를 약 7시간 가량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재판부에 따르면 A씨는 2013년께부터 피해자와 내연 관계였다. 피해자가 2018년 9월부터 약 1년 간 A씨가 혼자 사는 집에 총 58회에 걸쳐 출입하는 등 업무상 밀접한 관계는 물론, 사적인 관계에서도 내연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2019년 8월 15일 밤 10시쯤 식사를 하고 A씨 집으로 함께 온 B씨가 갑자기 구토를 하며 바닥에 앉아, 몸을 가누거나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A씨는 B씨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도 119에 신고하거나 차로 10분 거리인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는 대신, 집과 차량에 7시간이나 방치했다. 의식을 잃은 B씨가 자신의 집에서 발견될 경우, 내연관계가 발각돼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실추되고 가족과의 관계가 파탄날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A씨는 구토를 한 뒤 의식을 잃은 B씨를 집에서 약 3시간 가량 화장실 앞 복도 바닥에 내버려 뒀다가, 새벽 2시께 옷과 신발도 제대로 신기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와 차로 이동했다. 그가 차까지 B씨를 옮기면서 한 행동도 문제가 됐다. 그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해자의 양쪽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 자신의 자동차 옆에 눕힌 뒤, 차량에 태우려 했으나 잘 들어가지 않자 뒷좌석 '레그룸'에 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바닥에 쓰러뜨리고 질질 끌고 다니는 등의 행동은 뇌출혈로 쓰러진 피해자 상태를 더 악화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병원으로 가는 대신, 국토연구원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댄 A씨는 이 곳에서 4시간 가량 피해자를 또다시 방치했다. 이 시간 동안 B씨는 숨소리가 약해지는 등 상태가 점점 나빠진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B씨가 쓰러진 뒤 7시간 만인 새벽 6시께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피해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는 병원에서 마치 동료 직원인 B씨가 쓰러진 것을 A씨가 사무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면서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오열하기도 했다.
법정에서 "내연관계가 아니었고, 숙소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만 나눴다"며 범행을 부인했던 A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충북 청주의 한 모텔에서 투신했다가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건은 A씨가 살인의 고의가 있었는지를 두고 하급심 판단이 엇갈렸다. 1심은 "의식을 잃은 B씨에 대해 구호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망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유죄로 판단, 징역 8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A씨가 119 신고 등 구호조치를 이행했더라면 피해자의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만큼, A씨의 구호조치 의무 불이행과 피해자의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취지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이 맞다고 보고 A씨 상고를 기각했다.
살인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중 가장 죄질이 심한 범죄로,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진다. 본인 또는 배우자의 직계 존속(부모 등)을 살해한 경우 그 형량이 더욱 무거워진다. 살인죄의 양형 기준은 이렇지만 피해자 혹은 그 가족과 합의했는지, 전과가 있었는지, 초범 여부, 범행 수법 등 구체적 사정을 참작해 감형 또는 증형된다. 살인죄에 대한 최고 형벌은 사형이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이후 실제로 사형을 집행한 적은 없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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