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밟히지 않는' 스승의 권위는 드높았고, 교사는 학교에서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저항할 수 없는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교사 폭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사가 거꾸로 학생에게서, 그것도 초등학생에게서 폭행을 당하는 현실은 상상 초월이다. 학부모들에게도 교사는 ‘촌지’를 받아 챙기는 절대적 갑의 위치였다. 이제 학부모가 교사의 상전인 전혀 딴 세상이 됐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위치 역전을 교사의 업보(業報)로 보는 세평도 있다. 교사 폭력 피해자의 자식이 거꾸로 교사를 폭행하는 희한한 반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교사에 대한 적개심, 복수의 발로로 보는 건 물론 비약이다. 근본 원인 첫째는 권위주의의 급격한 붕괴와 인권의 지나친 강조다. 교사가 학생 위에 군림하는 유교적 권위주의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치와 어긋난 것이지만 허물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늘을 찌르던 교권은 반대로 추락 속도도 빨랐다. 반작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 침해가 심했던 만큼 저항과 반발도 강했다. 독재 권력이 셀수록 혁명은 급진적이 되는 것과 같다. 학생은 털끝도 못 건드리게 하는 학생인권조례의 과잉 규정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가도 너무 나가 버렸다.
또 하나는 권위주의의 몰락과 동반한 이기주의의 팽배다. 자기와 자기 자식만을 최우선시하는 학부모들의 가치관이 문제다. 고생을 덜 한 '유복한 한국인' 1세대인 현재의 학부모는 자식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자기중심의 개인주의에 젖어 있다. 시대상의 변화와도 맞물린 전반적 세태 풍조니 그저 탄식할 뿐이다.
꾸중하는 교사를 112에 신고하고 그 자식을 감싸는 부모 앞에서 교사가 설 땅은 없다. 말세라는 한탄이 쏟아진다. 전통적 권위의 복원을 부르짖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사의 서슬이 퍼렇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따지고 싶은 것은 인륜(人倫)이다. 삼강오륜을 들먹일 생각은 없지만 인간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예의, 공경, 효(孝), 존중, 배려, 공동선과 같은 보편적 윤리가 실종된 현실이다.
인권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갑을 관계가 아닌 대등 관계가 유지돼야 하는 것이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용자와 노조, 생산자와 소비자 같은 관계가 그렇다. 학생 인권과 교권도 다르지 않다. 둘은 상호작용을 한다.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내려간다. 마치 시소와도 같다.
근래의 사건들은 학생 인권과 교권의 불균형에서 비롯됐다. 둘 사이의 권리는 학생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 있다. 이대로 둘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도 다시 살펴보고 교권 보호장치도 가다듬어야 한다. '사랑의 매'의 부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돼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우습게 알고,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를 겁내는 세기말적 현상은 여기서 끝내자. 인륜을 회복시켜야 가능한 일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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