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전라도 고흥의 어느 한 마을에는 김덕방(金德邦)이란 의원이 있었다. 김덕방은 침을 잘 놓았지만 단지 평범한 의원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의원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조선침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특출날 것은 없었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김덕방은 전란에 참여했다. 그러나 군의병이 아닌 무관으로서 병사들을 통솔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왜놈들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어느 날, 왜군의 장수가 허리를 다쳐서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칼을 들고 휘두를 수도 없었다. 왜군은 의원을 수소문한 끝에 김덕방을 찾아냈다. 왜놈은 김덕방에게 칼을 겨누고서는 어서 침을 놓으라고 했다. 김덕방은 적군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평소 치료법대로 위중혈(委中穴)을 사혈(瀉血)하고 방광수(膀胱兪)에 침을 놓고, 팔료혈(八髎穴)에 뜸을 떴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번의 침술로 허리가 펴지고 말끔하게 나았다.
왜군은 조선의 침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이런 조선의 침술은 일본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효과 또한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왜장은 일본으로 귀환을 할 때 김덕방을 일본으로 끌고 가고자 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陶工)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것과 마찬가지 이유였다.
당시 일본에도 일본의학이 있었다. 일본 또한 명치유신 이전까지 만해도 한약과 침치료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의학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침에 있어서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조선의 침술은 뛰어났다.
김덕방은 일본 남부의 고치현(高知県)으로 끌려갔다. 고치현은 왜장의 고향이었다. 조선에서 최고의 침구 의사가 잡혀 왔다는 소문이 나서 환자들이 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에 도착한 김덕방은 그곳에서 일본 환자들을 치료했지만 조선에서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김덕방은 조선에서 그렇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낸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일본에 정착을 해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치료 도중에 죽는 경우도 생겼다. 김덕방은 당황스러웠다.
일본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 김덕방을 업신여겼다. 앞에서는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어쩐지 무시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자신을 잡아 온 왜장 또한 자신을 홀대하는 듯했다. 김덕방은 상심한 나머지 칩거에 들어갔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덕방은 '조선과 일본은 토양이 다르고, 사람들의 인성도 다르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서에서도 '풍토(風土)가 다르면 치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바람이 많은 바닷가, 습한 산악지역, 평지 등의 거주지역과 환자의 기질에 따라서 침구치료를 달리했다. 그랬더니 다시 금세 조선에서의 효과 이상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김덕방이 침을 찌르는대로 기사회생했다. 혈의 위치, 자침의 깊이, 뜸의 갯수, 사혈의 정도는 미리 꿈속에서 본 듯 명쾌해서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김덕방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제자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김덕방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비법을 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덕방은 자신의 침구 비법을 적은 책자를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다.
시간이 흘러 김덕방과 함께 끌려온 일부 포로들은 일본을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김덕방은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만약 되돌아간다면 일본인들을 침으로 치료해 주었던 것 때문에 비난받을 것이 마땅했다. 김덕방은 조선에 대한 마음에 빚이 있었고. 죄책감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비법을 쉽게 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침구 비법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일본 의원들은 김덕방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침구 비법을 캐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김덕방은 용렬한 의원들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부 의원들이 김덕방을 독살하려고 했다. 김덕방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의술이 한낱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분했던 것이다. 김덕방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덕방은 독배를 마셔야 하는 순간이 생겼다. 곁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술잔이지만 그 잔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김덕방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날이 추웠는지 한켠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김덕방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독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해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 독배로 죽지 않는다면 훗날 번득이는 일본도의 칼날에 맞아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 독으로 내가 죽으마."라고 했다.
김덕방은 한 손에 독배를 들고서는 다른 손으로는 품속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주위의 의원들이 "아~!"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자신들의 눈앞에 김덕방의 침구 비법책이 있는 것이 아닌가.
김덕방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만민을 구하는 침구 비전(祕傳)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전이 일본에 전해지는 것이 한이 될 것 같다."라고 하면서 책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선 독배를 마시고 자신도 숨을 거뒀다.
일본의 의원들은 독배를 마시고 괴로워하는 김덕방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닥불 속으로 던져진 책을 건져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침구 비전은 일순간 붉은 화염을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검은 잿더미로 변했다. 아쉽게도 김덕방의 침구 비법책은 불꽃 속으로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덕방에게는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나가타 쿠혼(長田德本)이었다. 나가타 쿠혼은 훗날 조선으로 따지면 허준 정도의 실력으로 일본에서 의성으로 통한 인물이다. 나가타는 당시 독자적 병리설을 제창한 도쿠모토류(德本流)라는 한 유파를 이룰 정도였다.
나가타 쿠혼은 스승의 침구 비법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모았다. 나가타 쿠혼조차도 김덕방의 비법 책을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의 치료법을 기억해내서 손수 적어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비법은 도제식(徒弟式)으로 전수되었다. 일명 '비인부전(非人不傳)'인 것이다. 김덕방으로부터 침구술을 전수받은 나가타 쿠혼은 다시 타나카 치신(田中知新)에 전해 주었고, 타나카 치신은 하라 타이안(原泰庵)에게 전해 주었다.
하라 타이안은 김덕방의 침구 비법을 마지막으로 키무라 타추우(木村太仲)에게 전해 주었고, 키무라 타추우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1778년,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이란 책을 저술했다. 김덕방이 일본으로 끌려 온 지 180여년이 흐른 후였다.
키무라 타추우는 <침구극비전> 서문에 "이 책은 나가타 쿠혼이 조선의 의관 김덕방에게서 전수받은 침술을 정리한 것이다. 중략.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금덩이가 산에 숨겨져 있다거나 진주가 연못에 가라앉아 있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물며 의술이란 것은 천하 백성들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을 집안에서 썩히는 것은 의술을 업으로 삼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전수받은 구결(口訣)의 각 조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서 세상에 공개한다. 이 책의 침술은 간명하면서도 얻는 것은 몹시 클 것이다. 의술에 뜻을 둔 세상 사람들이 이 침법을 널리 세상에 베풀게 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라고 적었다.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 '침구치료에 있어서 극히 비밀스러운 내용을 전한다.' 일본 최고의 의서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침구극비전의 그 비밀스러운 비법을 전해 준 사람이 바로 조선의 김덕방이었던 것이다.
의사학적으로 보면 김덕방은 일본의학의 스승이었다. 일본의 침구술은 김덕방에 의해 장족으로 발전을 했다. 명치유신 이후 사라져 버린 일본의학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면 김덕방의 조선 침구 비법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글만이라도 통해서 김덕방의 침구술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 제목의 OOOOO은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叙. 중략. 余鄕木子愼覃, 精於鍼灸, 嘗試術於平安數年, 所經驗亦多矣. 本有所傳之書, 今修次其書, 緣飾以己意, 錄爲一小冊, 公之世, 病症悉列, 輸穴明備, 便於懷袖, 易於檢閲, 可謂約而不失博矣. 若夫其所受授有淵源, 最爲可珍寶. (중략. 우리 고향의 키무라 타추우는 신중하면서도 예리한 사람으로 침구법에 정통하여 예전부터 몇 년 동안 헤이안에서 침술을 펼쳤고 경험한 환자도 매우 많다. 그는 본래부터 전수받은 책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책을 정리하고 본인의 생각을 붙여서 하나의 작은 책자로 만든 후 세상에 전파하였다. 이 책에는 온갖 병증이 죄다 나열되어 있고 수혈들이 분명하게 적혀있으며 품에 넣고 다니기에도 편리하고 찾아보기에도 쉬우니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광범위함을 놓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그가 전수받은 침구법에는 연원이 있으니 매우 진기한 보물이 될 것이다.)
自序. 斯一卷ハ昔慶長年間甲斐ノ國ノ良醫長田德本ト云人梅花無盡藏ノ作者也, 朝鮮國ノ醫官金德邦ト云人ヨリ授リシ術ナリ. 其後田中知新ニサツケテヨリ傳來リテ其家々ニ秘シテ, 傳ルニ口受ヲ以テシ, 或ハ其門ニ入ルトイヘドモ切紙ヲ以テ授テ, 全備スル人稀ナリ. 吾京師遊學ノ頃, 術ヲ大坂ノ原泰庵先生ニ學ヒテ兩端ヲ叩ク. 其後每々試ニ, 寔ニ死ヲ活スヿシハシハ也. 予思フニ, 金モ山ニ藏シ珠モ淵ニ沈メ置ハ何ノ益カアラン. 矧ヤ醫術ハ天下ノ民命ニカヽルモノナリ. 是ヲ家ニ朽サンヿ, 醫ヲ業トスル者ノ道ニ非スト. 此故ニ傳受口訣ノ條々一事モ遺サス書アラハシテ世ニ公ニスル者ナリ. 能此書ニ心ヲヒソメハ, 簡ニシテ得ル處大ナルヘシ. 世ノ術ニ志ス人々, 此法ヲ以テ弘ク世ニ施サハ, 予カ本懷ナリ. 陸奧福島 木邨太仲元貞 書. (이 한 권의 책은 옛날 게이초 연간. 1596-1615. 카이노쿠니의 명의인 <매화무진장>의 작가인 나가타 쿠혼이라는 사람이 조선의 의관 김덕방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수받은 침술이다. 그 후 타나카 치신에게 전수된 이후에는 그 집안에서 대대로 비전되어 전수될 때에는 구술에 의하거나 혹은 그 문하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요점만을 메모로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그 침술의 전체를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경사에서 유학할 때에 이 침술을 오사카의 하라 타이안 선생에게 배워 의심을 모두 해소하였다. 그 후 매번 시험할 때마다 진정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여러 번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금덩이가 산에 숨겨져 있다거나 진주가 연못에 가라앉아 있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물며 의술이란 것은 천하 백성들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을 집안에서 썩히는 것은 의술을 업으로 삼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전수받은 구결의 각 조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서 세상에 공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에 푹 빠질 줄 안다면, 간명하면서도 얻는 것은 몹시 클 것이다. 의술에 뜻을 둔 세상 사람들이 이 침법을 널리 세상에 베풀게 하는 것이 내가 속으로 바라는 바이다. 무츠노의 후쿠시마에서 키무라 타추우 모토사다 쓰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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