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는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고질적인 편두통으로 간혹 내의원의 침의(鍼醫)들에게 침을 맞곤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선조는 편두통이 발작할까 봐서 항상 불안했다.
어느 날, 선조는 침의(鍼醫)인 허임(許任)을 찾았다. 10여년 전에 선조는 지방 순행을 할 때 허임이 동행하면서 3일 간격으로 침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효과가 좋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임은 당시 고향인 나주에 내려가 있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허임은 침을 잘 놓아 일세(一世)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침의인데, 자기 마음대로 고향에 물러가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신들은 그를 궁으로 불러 모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만약 짐에게 뜻밖에 침을 쓸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하니 내의와 제조(提調) 등은 그 직책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내의원 신하들을 문책했다.
선조는 불시에 침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침의 허임을 곁에 두고자 한 것이다. 평소 편두통 발작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 실력있는 침의를 곁에 두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1604년(선조 37년) 9월 23일 가을밤. 초경말(初更末) 경에 선조는 평소 앓고 있던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했다. 초경말이면 밤 9시가 거의 다 된 시간으로 어의들은 이미 퇴청을 한 이후다.
선조는 “속히 의관을 들라 하라.”하고 명했다. 내시는 당직 중인 의관에게 전교하여 속히 침치료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사실 편두통이라는 것이 머리가 깨질 것처럼 그 통증을 견디기 힘들고, 심한 경우 눈도 뜨기 어렵고 구토까지 하면서 한번 발작하면 실신까지 하기도 해서 실로 가벼운 증세가 아니었다. 내의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직 중인 승지는 걱정스러운 나머지 “의관들만 입시(入侍)하는 것보다는 당직 중인 승지와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지금까지 침은 많이 맞아 보지 않았던가. 짐은 지금 침을 맞으려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갑자기 발작을 했는지 궁금하여 증세를 상의하려고 하니 승지 등은 입시할 필요가 없다.”라고 다시 전교를 내렸다.
그러자 승지는 당황해하면서 “지금 허임(許任)이 이미 내전 밖 합문(閤門)에 와서 대령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조는 굳어진 얼굴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더니 “허임을 속히 들여 보내도록 하라.”하고 명했다.
선조의 앞에는 이미 허준(許浚)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준은 당시 선조의 어의(御醫)였다.
선조는 허준에게 “지금 내 편두통에 침을 놓는 것에 해서 공의 생각은 어떠한가?”하고 묻자, 허준은 “지금 상의 증상은 긴급한 상태로 탕약을 달여서 복용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또한 증상이 자못 심각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침의에게 여러 차례 침을 맞으셨고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아 송구합니다만 그래도 침의들은 반드시 먼저 침을 놓아 기운이 소통시켜야만 통증이 감소될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그럼 공이 한번 침을 놓도록 하시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허준은 “소신은 침의가 아닌 약의(藥醫)이기 때문에 침의들의 침으로 응급처치를 한 후에 탕약을 대령해서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침의 허임이 대령해 있사오니 침치료는 대신 허임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허임 또한 말하기를 경맥을 소통시키는 침법을 사용한 후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으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오니 소신이 보기에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마침 허임이 도착했다. 선조가 허임에게 물었다.
“아시혈(阿是穴)은 어디에 위치한 혈자리인가?” 그러자 허임은 “아시혈은 어느 한 곳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픈 곳을 찾아서 혈자리를 삼는 것입니다. 아시혈은 환자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자리로 하늘이 정해준다고 해서 천응혈(天應穴)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병증에도 좋지만 특히 두통에는 아시혈에 침을 놓으면 아주 효과가 빠릅니다.”라고 고했다.
선조는 허임의 말을 듣고서는 서둘러 어서 병풍을 치도록 명하였다. 선조의 야밤의 편두통 발작으로 왕세자 또한 입시해 있었다. 선조는 왕세자와 함께 침의, 의관은 방안에 머무르게 하고 제조(提調) 이하는 모두 방 밖으로 나가 있도록 했다.
침의인 남영(南嶸)이 허임과 상의해서 혈자리를 정한 후에 허임이 침을 들어 올렸다. 허임은 깊은 숨을 한번 몰아 쉬고서 심지(心志)를 곧게 하고서는 후두부의 풍지혈(風池穴), 측두부의 두유혈(頭維穴), 전두부의 본신혈(本神穴)에 침을 놓았다. 이 혈자리들은 좌우 양쪽에 모두 한 개씩 있는데, 아프다고 하는 쪽의 반대쪽에 침을 놓았다. 일명 우병좌치(右病左治), 좌병우치법(左病右治法)이다. 그리고 환측(患側)에는 통증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아시혈을 찾아 침을 놓았다. 모두 10번 숨을 내쉴 동안 침을 꽂아 놓았다. 10번 호흡지간(呼吸之間)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선조의 편두통은 서서히 줄었다.
허임은 침을 제거했다. 선조의 깨질듯한 편두통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빠질 것 같은 눈은 편해졌고 구역감도 멎었다. 잠시 후 약방이 문안하니, 선조는 “평안하다.”라고 전교하였다. 이렇게 폭풍우와 같았던 밤이 지났다.
허임의 침을 맞은 선조의 편두통은 이후 다시 재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당시 침을 맞을 때 관여했던 약방 도제조, 제조, 도승지, 내의원 신하들에게 궁의 마구간에서 기르던 말 1필씩을 하사했고, 침의 허임 등에게는 직급을 한단계씩 높이도록 했다. 당시 어의였던 허준도 잘 길들여진 숙마(熟馬) 1필을 받았다.
이에 허임은 6품의 직에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전격적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당상관으로까지 승격이 지나치다고 간쟁(諫爭)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신하들은 “침의 허임은 6품의 관원으로 단지 침을 놓았다는 하찮은 수고로움으로 인하여 갑자기 당상관으로 승진함에 신들이 보기에 직책이 분수에 넘쳐 지나치오니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침이란 것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고마웠던 것이다. 선조는 허임을 무한신뢰했다.
허임은 1570년(선조 3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관노비였으며 그의 모친은 사노비였다. 허임은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에 시달렸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함에 한을 품고 의학에 뜻을 두었다. 선조 때에 신하들은 허임이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임을 얻은 것에 시기, 질투한 것이다.
그러나 허임의 침치료 실력은 당대 최고였으며 신묘하다고 칭송되었다. 허임은 평생 환자의 병환으로부터 고통을 없앤 것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죽을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았다. 의관에서 시작했지만 선조의 침의로 인정을 받으면서 광해군 때 이르러서도 지방의 관직을 여러 곳 거쳤다.
1609년(광해군 2년) 허임은 한때 고향인 나주에 내려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광해군은 내의원으로 들도록 재촉하는 전교를 여러 번 내렸지만 모두 거절했다. 허임은 선조 때에도 궁에서 다른 신하들의 중상모략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 끔찍했다. 사실 전교를 거절했다는 것은 어명을 거역한 것이다. 신하들은 허임이 군부(君父)를 무시했다면서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두도록 했다. 허임이 선왕 때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1644년(인조 22년) 허임은 말년에 자신의 침구 경험을 정리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편찬했다. 당시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서문에 “나는 우둔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을 앓아 의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노력하여 의학의 문호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노쇠하여 바른 치료법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염려되어 평소에 듣고 본 것을 가지고 대충 편을 묶고 차례를 만들었다. 감히 옛 사람들의 저술에 견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 동안 노력하여 마음으로 얻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자가 마음을 쏟는다면 급한 환자를 구하고 목숨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책을 만든 이유를 적었다.
이 책을 통해서 허임의 침구술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침구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침법이 중국이나 일본의 침법에 대해서 탁월할 효과가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데, <침구경험방>은 그 근거가 되고 있고 조선의 침술을 알리는데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중 조선 최고의 침의라면 허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제목의 〇〇은 허임(許任)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宣祖 37年 9月 23日. 初更末, 上所患偏頭痛急發, 傳于直宿醫官, 欲爲受針, 入直承旨啓曰: “醫官等, 獨爲入侍未安. 入直承旨及史官, 竝入侍何如?” 傳曰: “非受針也, 欲問證勢, 承旨等勿入.” 又啓曰: “許任, 已到閤門矣.” 傳曰: “入來.” 二更三點, 入侍於便殿, 上曰: “施針如何?” 浚曰: “證勢緊急, 不可拘於常例. 屢度受針, 似爲未安. 而針醫等每曰: ‘必施針, 消散熱氣, 然後痛勢’ 可歇云, 而小臣則不知針法. 渠輩所言, 如此故啓之矣. 許任常言, 引經後, 可以進針於阿是. 此言似有理.” 上命設屛, 王世子及醫官, 入侍於房內, 提調以下, 皆在房外. 南嶸點穴, 許任執鍼, 上受鍼.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9월 23일. 1경 말에 상이 앓아 오던 편두통이 갑작스럽게 발작하였으므로 직숙하는 의관에게 전교하여 침을 맞으려 하였는데, 입직하고 있던 승지가 아뢰기를, “의관들만 단독으로 입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입직한 승지 및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침을 맞으려는 것이 아니라 증세를 물으려는 것이니, 승지 등은 입시하지 말라.”하였다. 또 아뢰기를, “허임이 이미 합문에 와 있습니다.”하니 들여보내라고 전교하였다. 2경 3점에 편전으로 들어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송구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병풍을 치라고 명하였는데, 왕세자 및 의관은 방안에 입시하고 제조 이하는 모두 방 밖에 있었다. 남영이 혈을 정하고 허임이 침을 들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〇 鍼灸經驗方序. 전략. 愚以不敏으로 少爲親病하야 從事醫家하야 積久用功하야 粗知門戶러니 及今衰老하야 仍恐正法之不傳하야 乃將平素聞見하야 粗加編次하야 先著察病之要하고 幷論轉換之機하야 發明補瀉之法하고 校正取穴之訛하며, 又著雜論若干하고 且記試效要穴及當藥하야 合爲一卷하니 非敢自擬於古人著述이 只爲一生苦心을 不忍自棄니 覽者若能加之意則庶於救急活命에 或有少補云爾라. 河陽許任識. (침구경방서. 전략. 나는 우둔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을 앓아 의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노력하여 의학의 문호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노쇠하여 바른 치료법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염려되어 평소에 듣고 본 것을 가지고 대충 편을 묶고 차례를 만들었다. 먼저 병을 살피는 요지를 보이고 아울러 때에 따라 치법을 변화시키는 기틀을 설명하였으며, 보사의 방법을 밝히고 취혈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또 이런저런 의론을 약간 적고, 써보고 효과를 본 중요한 경혈들과 합당한 약들을 기록하여 한 권으로 묶었다. 감히 옛 사람들의 저술에 견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 동안 노력하여 마음으로 얻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자가 마음을 쏟는다면 급한 환자를 구하고 목숨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양 사람 허임 적다.)
〇 頭面部. 偏頭痛하고 目䀮䀮不可忍風池 頭維 本神에 患左治右하고 患右治左호대 皆留鍼十呼하야 引氣면 卽差니 神效오. (편두통이 있고 눈이 아득하여 견딜 수 없는 경우풍지 두유 본신을 쓰는데, 왼쪽이 아프면 오른쪽을 오른쪽이 아프면 왼쪽을 치료한다. 모두 10번 숨 내쉴 동안 유침하며 기를 끌어 땅기면 곧 나으니 매우 효과가 좋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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