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엄마는 네살 꼬맹이 시절 아들의 사진과 중년이 된 아들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에 아들은 흰머리가 송송 난 50대가 됐고 20대였던 엄마는 주름진 70대 노인이 됐다. 실종 48년. 엄마는 '꿈에라도 보고 싶던' 아들을 드디어 찾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엄마는 "요즘 꿈속을 살고 있는 것 같아 깨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난 2일 뉴스1은 48년 만에 실종된 아들을 찾은 엄마 최영자씨(71)를 만났다. 영자씨는 1975년 7월 잃어버린 아들 백상렬씨(52)의 행방을 지난 7월에 찾았다. 아들을 찾으러 국내를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정작 아들은 노르웨이로 입양돼 평생을 살았다.
영자씨는 자신과 같이 평생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는 부모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과 부모를 잃고 자란 아이들이 부모를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말했다.
◇한해 '두 아이' 잃고 파탄 난 삶
1975년 7월 서울 동작구, 상렬씨는 친구들과 함께 소독차를 쫓아간다며 집을 나섰다. 영자씨는 이후 돌아온 아이를 씻기고 간식을 먹인 뒤 '더우니 이제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고 했는데 아이는 어느샌가 집을 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또 친구들과 놀러 나갔겠지' 했는데 다른 아이들이 돌아올 때도 아들은 집에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자씨 가족의 삶에 그늘이 드리웠다. 장남인 상렬씨를 잃어버리고 영자씨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를 찾으러 다니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 영자씨 복중에 자라고 있던 아기는 가족 품에 한번 안겨보지도 못한 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자씨는 "죽은 아이한테도 너무나 미안하지. 얼마나 가슴이 아파. 한해에 자식 둘을 잃어버린 거잖아. 이걸 어디에 보상받고 누구한테 말을 하겠냐고"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아이를 잃어버리고 영자씨는 남편과 함께 전국을 헤맸다. 남편은 냉장 기술자로 벌이가 괜찮았지만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남편의 지인이 있는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렇게 영자씨의 가족은 1980년 5월을 광주에서 맞았다.
영자씨는 남편이 5.18 당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터미널에서 계엄군과 만나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폭행을 당하고 실종이 됐던 남편은 닷새만에 피범벅인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남편은 이후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영자씨는 홀로 장사를 하며 상렬씨 밑으로 낳은 3명의 자식을 키웠다.
자식을 잃은 고통과 생계의 어려움으로 영자씨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심장병을 앎았고, 4년 전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영자씨는 "(아들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어.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우리 아들 못 보고 죽으면 어쩔까 걱정을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열씨의 아버지 고(故) 백계남씨는 평생을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아들의 열굴을 보지 못하고 2017년 별세했다. 생전 백씨는 아들이 보고 싶다는 영자씨에게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아, 걔가 우리를 찾아줘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발품으로 못 찾은 아들 DNA로 찾았다
지난 7월11일 영자씨는 낯선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상렬이 엄마 안녕하세요. 아들 찾았어요"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영자씨는 실감이 나지 않아 "그래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보이스피싱이 아닌가 의심이 돼 고민을 하다 다시 전화기를 들어 반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아들을 찾았다'는 똑같은 말을 했다. 이번에도 믿을 수 없었던 영자씨는 전화를 끊었다가 세번째로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일치한다'는 설명을 듣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때의 심정에 대해 영자씨는 "확실하다고 하니까 그때 펑펑 울었어…(기분이) 말도 못 했지 붕 떠 있는 것 같고 다리가 안 떨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했어"라고 말했다.
며칠 뒤 영자씨는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하게 됐다. 노르웨이로 입양된 상렬씨는 새 이름을 얻었고 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상렬씨는 현재는 의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영자씨는 48년 만에 아들을 되찾고 두명의 손자도 얻게 됐다.
모자를 이어준 것은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DNA의 끈이었다. 뉴스1은 지난 2019년 DNA를 이용해 44년 전 잃어버린 딸을 찾은 한태순씨의 사례(관련기사: '꽃신' 신고 사라진 6살 딸 경하, 44년간 헤매다 찾았다)를 보도했다. 당시 태순씨는 입양된 한인들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친부모를 찾아주는 비영리단체 '325캄라'(325kamra)를 통해 딸을 찾았다.
태순씨의 사례가 보도된 이후 다수의 실종아동 부모들이 국내 기관인 ‘뿌리의집’을 통해 유전자 등록을 했고 등록된 DNA를 325캄라 측 자료와 비교해 가족을 찾는 사례들이 이어졌다.
상렬씨는 부모가 자신을 버린 것으로 알고 그동안 부모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전자 등록을 하게 됐고 등록 한달여 만에 친모를 찾았다. 영자씨는 최근 영상통화에서 아들에게 "나는 너를 절대 버리지 않았다"고 반복해 말했다고 했다. 상렬씨도 "잊지 않고 찾아줘서 감사하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오는 가을 상렬씨는 한국을 찾기로 했다. 아들을 만나면 무엇을 해주고 싶냐는 물음에 영자씨는 "생일 때 미역국을 한번도 못 끓어 줬으니까 미역국도 끓여주고 싶고, 불고기도 하고 케이크도 사고 해서 밥을 맛있게 해서 먹이고 싶어. 김치 같은 건 못 먹을 테니까 백김치도 담아서 먹이고…"라며 한동안 말을 마치지 못했다.
◇국가가 '고아'로 만들고 '입양' 허가해
상렬씨가 보관하고 있던 입양기록들을 보면 상렬씨는 최초 수원지역에서 발견돼 수원시청을 거쳐 1975년 7월12일 수원 소재의 아동양육시설(고아원)에 맡겨졌다. 세월이 지나 실종날짜에 대한 영자씨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실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달만인 8월13일 홀트아동복지회에 등록된 상렬씨는 다수의 신체검사와 예방접종 등을 받는 등 곧바로 입양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홀트아동복지회는 1975년 10월 새로운 호적등본을 만들어 상렬씨를 호주로 올렸다. '고아'로 분류돼야 부모의 동의 절차가 생략되는 등 입양이 쉬워지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런 단독호적(고아호적)을 만드는 것이 빈번했다. 고아호적을 만드는 과정에 서울가정법원과 홀트아동복지회가 위치한 지차체인 서울 마포구의 승인이 있었다. 그렇게 상렬씨는 '안동(安東) 정씨' 성의 '정일우'가 됐다.
상렬씨의 '입양승낙서'를 보면 당시 홀트아동복지회의 회장이 '서울시장의 임명한 법정후견인'의 권한으로 양부모에게 아이를 입양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앞서 서울시는 1975년 8월11일 '보호시설에 있는 미성년자인 고아의 후견인 지정 증명원'이라는 이름의 서류를 발급해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의 후견인 자격을 중명했다. 해당 문서에는 서울시장의 직인이 찍혀 있다.
1975년 12월 여권과 비자가 발급됐고 정일우가 된 상렬씨는 1975년 12월22일 김포공항에서 노르웨이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실종이 되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해외로 입양이 된 것이다.
영자씨는 아이를 잃어버리고 난 뒤 경찰서를 돌며 실종신고를 하고 수색을 요청했다. 만약 시청 직원이 상렬씨를 곧장 아동시설로 보내지 않고 경찰서로 인계했다면 부모는 반세기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
영자씨는 "말도 못 하게 찾으러 다녔는데 알고 보니 외국으로 보내고 없었던 것"이라면서 비슷한 사례들을 밝혀내 더 많은 실종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입양기관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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