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논쟁은 개념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대 에 따라 노인에 대한 관념도 달라졌다. 아니, 더 모호해졌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이라는 생물학적 접근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낡은 기준으로 불리는 것에 거부감이 크다. 노인들조차 스스로 이런 개념을 싫어한다. 공공기관이나 편의시설에서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애써 예의를 갖춰 불러도 싫어한다. 노인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노인이라는 표현으로 현대 사회의 노인들을 규정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시대에 어울리는 노인 대체용어를 찾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어른, 어르신, 시니어, 실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노인을 대체할 표준용어로 정해진 건 없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존재감을 얻는다. 노인에 대한 기피현상과 대체용어가 부재한 상황을 따져본다면, 우리나라에 노인은 없다.
정체성이 없는 존재는 위태롭다. 노인을 둘러싼 막말 논란이나 기피현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지는 이유다. 우리나라 시대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생물학적으로 미약하고 돌봄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화석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노인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심리적 프리즘을 통해 고령의 어부 내면을 통찰하고 있다. 인생의 말로에 선 노인과 거대한 상어와의 사투 속에서 희망과 열정 그리고 고독을 그려낸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동시에 소통을 갈망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사일로(Silo)에 갇혀 있다.
노인 수난시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태어나는 사람은 줄고 늙은 사람이 많아지는 초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다. 반면, 노인에 대한 인식은 힘없는 돌봄 대상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덩달아 노인에 대한 관심과 정책들도 2순위로 밀리는 추세다. 저출산·고령화 정책에 나타나듯 출산 정책에 올인하고 고령화 문제는 나중에 어떻게 해보자는 심산이다. 실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노인 연령 65세 기준을 상향하는 문제를 놓고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정년 연장 방안도 풀어야 할 숙제다. 국민연금 납입과 수급기간을 설정하는 것도 노인 문제와 직결돼 있다.
노인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노인 일자리가 늘수록 젊은 세대의 설 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논리는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나아가 노인 정책은 욕구의 다양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노인마다 계층별로 먹고 사는 형편과 목적이 다르고, 살아온 궤적에 따라 하고 싶은 것과 원치 않은 게 다르다. 돌봄이 필요한 늙은 사람이라는 단순도식화된 사고방식으론 노인 문제를 풀 수 없다.
누구든 젊은 시절은 겪어봤다. 그러나 노년의 경험은 해본 사람만 안다. 젊은 세대는 조부모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노년을 향해 가는 게 인생이다. '노인 수난 시대'가 아니라 '노인 행복 시대'를 열어야 한다.
jjack3@fnnews.com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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