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8.14 18:20

수정 2023.08.14 18:20

[강남시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이병헌 주연의 한국형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유쾌한 이웃'이라는 제목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대지진 후 황폐화된 세상에 유일하게 남겨진 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지난 9일 개봉한 이 영화가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인에겐 주거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아파트'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내세워서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한국에서 아파트는 집 그 이상이다. 아파트는 영혼을 쉬게 하는 삶의 공간이자, 자산증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어디 사십니까"라는 질문에 숨겨져 있는 의미처럼, 아파트는 또 너와 나를 구별하는 표지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좀 과장하자면 아파트는 계급의 척도, 불평등의 증거로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쓴 벽안의 프랑스 여성 사회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한국 아파트를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영화는 흥미로운 오프닝 시퀀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짧고 경쾌하게 요약한 이 몽타주는 감독이 이번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장면들은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룬 KBS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불패'에서 가져왔는데, 이때 사용되는 배경음악이 누구나 다 아는 그 노래, '즐거운 나의 집'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대폭발이 일어나고, 세상엔 영화의 배경인 황궁아파트 한 채만 덩그러니 남는다.

윤수일의 '아파트'가 적절하게 사용되는 부분도 흥미롭다.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의 하나인 '아파트'는 지난 1982년,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던 시절 만들어져 애창됐다. 사람들이 흔히 떼창으로 부르곤 하는 이 노래는 경쾌한 멜로디와 달리 조금은 쓸쓸하고 애잔한 가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다시 또 찾아왔지만/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쓸쓸한 너의 아파트…." 아마도 명민한 감독은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이 노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집'을 지키기 위한 야만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점도 이 영화가 이룬 성취의 하나다.
평범했던 황궁아파트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주민대표 영탁(이병헌)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는,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황궁아파트가 디스토피아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재난 이후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가 드물지 않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런 영화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거기에 한국 사회의 모순과 맥락이 비교적 세밀하게 반영돼 있어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유일한 생존자 명화(박보영)에게 누군가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사람도 잡아먹는다면서요"라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요,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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