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멕시코에서 김밥 말던 정유미가 ‘본캐’ 배우로 강렬하게 돌아왔다. '기생충'의 이선균과 부부 호흡을 맞춘 영화 ‘잠’을 통해서다.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이 영화는 봉준호 조감독 출신인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이다. 봉 감독이 이선균에게 작품을 소개했을 뿐 아니라 “최근 10년간 본 가장 유니크한 공포영화”라고 호평했다. 지난 18일 국내 언론에 첫 공개됐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잠’은 남편의 수면 중 이상행동에 단란한 신혼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린 젊은 부부의 이야기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내 집을 무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공포의 원천이 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돋보인다.
3장으로 이뤄진 이 영화에서 정유미는 만삭의 몸에도 배우인 남편 현수의 꿈을 지지하며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사랑스런 아내 수진을 연기했다.
자다가 일어나 음식을 먹는 등 이상 행동을 하던 남편이 어느 밤, 중얼거린다. “누가 들어왔어.” 하지만 현수는 수면 중 이상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행여나 자신이 가족들을 해칠까 두려움을 느낀다. 수진은 출산 후 그런 현수로 인해 혹시나 갓 태어난 아기가 다칠까봐 잠들지 못한다.
1장이 현수의 예측불허 이상행동이 공포를 자아낸다면, 2장은 수면부족과 불안에 시달리는 수진의 모습이 조마조마하다. 그러다 가장 영화적인 3장에서 수진은 자신만의 믿음에 갇혀 광기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정유미는 절박한 엄마이자 아내로 스크린을 장악하고, 극중 이선균과 관객의 심리를 절벽 끝으로 내몬다.
이상한 잠꼬대, 자해, 심지어 가족을 해치기도 하는 ‘몽유병’ 또는 ‘수면 중 이상행동’ 환자들의 사례를 접한 유 감독은 깨고 나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당사자보다,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유 감독은 “영화의 전반부는 수진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수의 공포”라며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서서히 변하는 공포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아냈다고 전했다
‘잠’은 장르적 쾌감을 갖춘 공포스릴러지만 동시에 인생이라는 한 배를 탄 부부가 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멜로 영화같기도 하다. 절정의 공포 끝에 찾아오는 것은 두 부부의 애틋한 동지애다.
유 감독이 실제로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그래서일까? 영화의 전개와 상관없이, 만삭인 정유미의 모습에서 경제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이 되어야하는 남자의 공포심리가 문득 연상된다.
자신의 꿈을 지지해준 아내를 위해 남편이 극적인 순간에 펼치는 직업적 재능은 마치 아내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부부의 거실에는 “둘이 함께라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편 유 감독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옥자'의 연출부, '버닝'의 영문 자막 번역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