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재해와 사건사고로 인해 유난히도 웃을 일이 없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 말도 안되는 사건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이 조절할 수 없는 분노를 여기저기에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예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과 자괴감도 더 깊어진다. 답은 찾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냥 놓아버려서는 안되는 질문들은 잠시 묻어두고, 재미있는 뮤지컬 한 편으로 아직 남아 있는 더위를 유쾌하게 날려보내는 것도 이 여름을 잘 넘기는 방법일 듯하다.
뮤지컬 '구텐버그'는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작품으로 2013년 초연해 10년이 되는 2023년 네 번째 재공연을 맞이하고 있다. 한 공연이 네 번의 재공연을 한다는 건 무언가 매력이 있다는 증거다. 이 작품은 한 명의 연주자(피아니스트)와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소극장 코미디뮤지컬로 일인다역의 연기로 다이내믹하게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러한 형태의 작품은 꽤 있었는데 '구텐버그'가 돋보이는 지점은 탄탄한 대본과 더불어 희극 양식에 대한 교과서적인 활용에 있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에 의하면 희극의 웃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희극이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서 공연의 여러 가지 계산적인 설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관객들은 잘 모른다. 그냥 웃겨서 웃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웃기기 위해서는 울리는 것보다 더 복잡한 설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개그적인 웃음이 아닌 희극으로서의 웃음을 만드는 것은 더 어렵다. '구텐버그'는 이런 측면에서 희극의 형식을 극의 구성안에 매우 효과적이고 현명하게 설계해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연 시작 전에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배역이 아닌 배우로서 놀고 장난치고 있으며, 공연의 시작은 연주자인 피아니스트가 객석안내 멘트와 등장인물 소개를 하면서 시작한다. 이어 등장한 버드와 더그는 자신들이 이 뮤지컬의 작가와 작곡자이며 자신들이 만든 뮤지컬 '구텐버그'의 낭독공연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설정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공연이 앞으로 펼쳐질 방식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주고 연극적 방식을 통해 극적 이야기들이 전달될 것이라는 무대와 객석의 약속을 만들어준다. 얼핏 별 것 없어 보이는 이러한 장면들이 실은 관객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공연의 형식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공연은 버드와 더그가 뮤지컬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극중극인 구텐버그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두 명의 배우(작가와 작곡가)는 배역의 이름이 씌어있는 모자를 바꿔가며 일인다역을 연기한다. 화려하고 멋진 무대의 스펙타클은 관객의 상상력과 배우의 연기로 채워진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제가 무대에서 제자리로 걷는 시늉을 한다면 여기는 회전 무대인 것이죠’. 버드와 더그는 뮤지컬 ‘구텐버그’를 연기하면서 각 장면의 의미를 직접 설명한다. 아이 원트 송(I Want Song), 캐릭터 구축, 쇼 스토퍼(Show Stopper), 댄스 브레이크, 메타포 등 뮤지컬 극작의 테크닉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관객과의 연극적 놀이를 이어간다.
다양한 희극적 테크닉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사용하면서도 그 형식의 기능과 역할을 정확하게 설정해 개그가 아닌 희극적 웃음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성경을 인쇄해 성직자의 권력을 무너뜨린 구텐버그의 이야기는 선명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구텐버그의 극중극 이야기가 버드과 더그의 뮤지컬 만들기에 결합돼 극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극중극을 연기하는 버드와 더그는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지하게 ‘구텐버그’ ‘성직자’ ‘헬베티카’를 연기할수록 관객들에게 더 큰 웃음을 선사하는 아이러니도 함께 포함돼 있다. 마지막에 객석에서 프로듀서가 등장해 반전과 함께 유명배우가 짧게 등장하는 임팩트 있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렇게 희극의 내용과 형식을 단 두명의 배우로만 짜임새 있게 만들다니 정말 놀랍고 부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좋은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뮤지컬 '구텐버그'의 올해 공연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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