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손성진 칼럼] 정율성 논란과 홍난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8.28 18:10

수정 2023.08.28 18:10

[손성진 칼럼] 정율성 논란과 홍난파
정율성이라는 생소한 인물이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다.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공산당에 입당,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한 광주광역시 출신의 사회주의자다. 옌안의 마오쩌둥 밑으로 들어간 그는 광복 후 고향이 아닌 북한으로 귀국, 6·25전쟁에 참전하고 조선인민군가를 작곡했다. 광주시가 그런 정율성을 기리는 공원을 건립한다고 해 시끌시끌하다.

정율성이 상기시키는 인물들이 있다.
김원봉과 홍난파다. 의열단장으로 잘 알려진 김원봉은 정율성이 다닌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설립자다. 좌우익의 통합을 위해 힘쓴 인물로 평가받는데 광복군에 투신, 남한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좌익으로 분류돼 탄압을 받다 월북, 북한에서 초대 국가검열상과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냈다. 항일 투쟁 사령관이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같은 작곡가로서 홍난파의 일생은 비극적이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돼 72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홍난파는 굴복하고 전향서를 썼다. 침으로 손톱 밑을 찌르고 못이 박힌 상자에 사람을 넣어 굴리는 잔인한 고문을 안다면 심하게 비난할 수 없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홍난파는 친일 활동을 했다. 그러다 석방 4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정율성에게 문재인 정부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했다. 서훈이란 건국훈장, 즉 대한민국 수립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을 말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을 세웠지 대한민국 건국에는 공이 없다. 중국군 위문단으로 참전, 국군을 향해 사실상 총부리를 겨눴다. 항일 투쟁도 분명히 밝혀진 게 없다.

중국이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맞섰듯이 항일 투쟁에는 좌익과 우익이 따로 없었다. 좌익 활동을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념 매몰적이다.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윤세주와 박차정(김원봉의 부인)은 훈장을 받았다. 이념 논란이 있지만 광복 전에 사망했고 북한 정권에 관여한 적은 없다. 주세죽(박헌영의 부인) 등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 것도 독립운동과 이념을 분리해서 재평가한 결과다.

그러나 정율성은 문제가 다르다.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한 것은 없고 중국과 북한에 충성과 재능을 바쳤다. 중국 공산당원으로 남쪽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고 한반도 공산화를 꿈꿨다. 우리가 기릴 이유가 전혀 없다. 정율성은 중국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영웅이 됐다. 중국 하얼빈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광주에는 이미 '정율성로'가 조성돼 사진과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거나 과하다. 김원봉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는 김원봉 공원이 없다. '의열기념관'에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홍난파에게는 친일 작곡가라는 가혹한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가혹하다는 건 민족의 혼을 담은 노래를 작곡해서가 아니다. 일제에 저항하다 고문에 못 이겨 무릎을 꿇은 억울함 때문이다. 매일 각혈을 하는 심신 상실 상태에서 그는 협박을 받았다. KBS홀 맞은 편에 있던 그의 흉상은 철거되어 서울 홍파동 가옥으로 옮겨졌다.
경기도 화성의 생가 조성사업은 19년째 표류하고 있다. 홍난파가 한국 음악사에 남긴 공적은 지대하다.
정율성보다 홍난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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