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식 창구에 더해 비공식 소통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특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국가 간 관계나 권력 경쟁을 펼치는 정치진영 간 관계에서 비공식 소통망이 중요하다.
비공식 소통망의 대가인 빌 리처드슨이 9월 초 별세했다. 그는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비공식 창구로서 억류 미국인 석방과 미군 유해 송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북한, 쿠바, 러시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수단, 콜롬비아 등 힘든 국가를 상대로 성과를 냈다. 북한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1994년 휴전선 근처에서 미군 헬기가 격추되자 북한 현지 협상으로 숨진 조종사의 유해를 돌려받고 생존자의 귀환을 이끌어냈다. 1996년에는 밀입국 혐의로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을, 2007년에는 6·25전쟁 전사 미군 유해 반환을, 2009년에는 취재하다 북한 국경을 넘은 미국인 기자의 석방을, 2013년에는 억울하게 억류된 미국인의 생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연초 언론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부가 요청하면 북한 억류 한국인들의 석방을 위해 비공식 창구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리처드슨의 경력은 화려하다. 30년에 걸쳐 연방 하원의원, 유엔 대사, 에너지 장관, 주지사로 활약했고 2008년에는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서기까지 했다. 이처럼 전국적 정치인이었지만, 후대에 그는 비공식 소통망을 가동하고 협상력을 발휘해 많은 미국인의 귀환을 이룬 인도주의자로 더 기억될 것이다. 특히 정계 은퇴 이후에도 민간인으로서 그런 활동을 이어가 해외 억류 인사들을 귀국시킨 점이 그의 이름을 높였다. 괜히 노벨 평화상 후보로 5번이나 추천되었겠는가.
그의 성공 요인은 비공식적이지만 공개된 소통망을 활용했다는 데 있다. 억류나 납치된 시민을 돌려받는 민감한 일은 공식 창구로 힘들다. 국가의 체면과 명분을 잃지 않으며 현실적 거래로 성과를 얻으려면 비공식 라인이 유용하다. 또한 비공식적이면서도 공개성이 높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힘든 거래 시 비밀스러운 첩보방식을 쓰면 국내외 여론의 힘을 빌릴 수 없고 자칫 정치의혹만 낳을 수 있다.
리처드슨이 공개된 비공식 소통방식을 잘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 능력에 미국 정부의 유연함이 합해진 덕이다. 그는 친화력 높고 겸손한 인품을 지녔고 키신저 국무장관 보좌진 출신답게 현실주의적 계산에 능했다. 그러나 만약 미국 정부가 적대국과의 관계에서 경직된 강경론만 고수하고 비공식 소통망 위주의 '주변적 외교'(fringe diplomacy)를 외면했다면 그는 '악당 담당 비공식 차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깐 멍석 위에서 그는 맹활약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정부는 호전적인 북한을 상대할 때 원칙 있는 기조를 지키면서도 비공식 소통망을 유지하는 융통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러시아, 중국 등 껄끄러운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또한 국내 정치에서도 여야는 공식적으로는 각자의 국정철학을 견지하면서도 상호 간에 비공식 대화창구마저 닫아버려선 안 된다. 여야 모두 양극화와 단절의 악순환에 빠져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말이 쉽지, 북한처럼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체제나 오늘날 여야 진영처럼 집단주의적 흑백논리에 굳어 있는 정파를 상대할 때 비공식 소통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포기하기보다 희망 섞인 노력을 시도해야 부분적 성과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약력 △64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학사 △서강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미국 MIT 정치학 박사 △국회입법조사처장 △한국정당학회 회장 △서울시 선거관리위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현)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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