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서상혁 유민주 기자 = "가까이 들여다보니 이렇게 깊네요. 예전에는 별 신경 안 썼는데 이제는 좀 피해 다니려고 합니다. 불안하긴 하네요"
지난 17일 오후 3시 서울 역삼역 인근 모 빌딩 앞. 30대 회사원 김모씨는 건물 앞 지면에 설치된 환기구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는 "평소에 환기구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사고 이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난 11일 밤 11시쯤. 40대 남성 A씨는 이 환기구에 추락했다. 다음날 오후 경비원에 의해 발견됐지만, 이미 숨져 있었다. 해당 환기구는 지하 5층 깊이로 조사됐다. 경찰은 환기구에 휴대폰을 빠뜨리자 줍기 위해 철제 덮개를 열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냈다.
건물 관리업체는 이날 오전 철제 덮개를 손으로 들어 올리지 못하도록 용접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환기구 위에 올라가지 마시오" 등 경고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근 직장인 이모씨(33)는 "아예 올라가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혀를 찼다.
2014년 판교 추락사고 이후 환기구 사고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재발 방지책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고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신규 환기구에 대해선 지상으로부터 일정 높이 이상 지점에 설치하도록 하는 등 시민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만들어진 환기구에 대해선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 공사'에 그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기존 환기구에 대해서도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의 후속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판교 참사' 이후 관련 규정 손질…이미 만들어진 환기구는 적용 안돼
환기구란 건물 내부의 환기를 위해 외부에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말한다. 주로 지하철역 인근이나 빌딩 뒤편이나 측면에 설치돼 있다.
지난 2014년 10월 '판교 테크노밸리 축제' 당시 관람객이 인근 지하철 환기구 위에 올라가 공연을 보던 중 철제 덮개가 무너져 내려 16명이 사망하는 이른바 '판교 참사'가 발생했다. 환기구 안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환기구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는 종종 발생하고 있다. 최근 역삼역 사고를 비롯해 지난 5월에 경기 용인시의 한 임대주택 쓰레기장에서 60대 여성이 환기구에 추락해 다쳤으며, 4월에는 용산구 모 빌딩 경비원이 지하주차장 청소 중 추락해 숨졌다.
판교 참사 이후 정부는 재발 방지를 위해 관련 규정을 손봤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015년 '건축물의 설비기준 등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며 '일반건축물의 환기구는 바닥으로부터 2m 높이에 설치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안전 울타리를 통해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서울특별시도 같은 해 공공 건축물의 환기구에 대해선 지상으로부터 1.5m 높이에 설치하고 불가피할 경우 안전 펜스를 만들도록 하는 '공공시설 환기구 설치 및 관리기준'을 만들었다. 서울 지하철 환기구는 건축물이 아닌 만큼 국토부 규칙이 아닌 서울시 관리 기준을 적용받는다.
하지만 이들 규정은 '새로 만들어지는 환기구'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이전에 설치된 환기구에 대해선 소급 적용도 되지 않는다. 국토교통부의 '환기구 유지관리 가이드라인'에도 2m가 되지 않더라도 환기구 덮개의 하중 기준만 충족한다면 안전 펜스를 설치지 않아도 된다고 돼 있다.
뉴스1이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서울 시내 지하철역·빌딩 인근 환기구 40곳을 무작위로 조사한 결과, 그중 25곳의 높이는 2m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7곳만 유리 차단막이 설치돼 있었다.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의 환기구도 상당했으며, 지면과 높이 차이가 없어 손쉽게 올라설 수 있는 환기구도 일부 있었다.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경고도 충분치 않았다. 대다수 환기구엔 '추락 위험' 표시판이 붙어있었지만, 몇몇 환기구에는 환기구 번호만 적혀 있었다.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경고 문구도 빛이 바래 잘 보이지 않았다.
◇환기구 통계 2015년 이후 없어…전문가 "시민 접근 원천 차단할 방안 강구해야"
환기구 관련 통계 역시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 관리기준을 발표하며 당시 기준으로 서울 전역에 1만8862개의 환기구가 있으며 덮개 지지대를 보강하는 등 보수를 마쳤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관련 부서가 다른 부서로 통폐합되면서 최신 통계는 없는 상황이다.
국토교통부도 과거 전국적으로 환기구 전수조사를 진행했지만 건물 구조가 매우 다양하다는 이유로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이 환기구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설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진주 숭실대사이버대학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사람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드는 것보다 아예 못 올라가게 하는 게 확실하다"며 "일본의 경우 일반 도로에 있는 환기구들을 사람 키 높이 이상으로 만들어 놓으라는 규정은 있지만 철조망 이외에 어느 정도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지는 규정된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재난학과 교수는 "하중을 견디도록 만들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녹이 슬고 부식된다"며 "생명과 관련된 일인 만큼 안전에 대한 투자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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