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원인은 캐즘(chasm)에 있다. 땅이 갈라진 거대 틈을 말하는 지질학 용어로, 신제품 출시 후 수요가 정체하거나 줄어드는 현상을 설명할 때도 사용된다. 시장에는 신제품이 출시되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혁신적 소비자(early adopter)가 있다. 이들로 인해 신제품에 대한 시장 분위기가 뜨거워진다. 하지만 다수의 후속 소비자는 신제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린 후 소비를 한다. 이들 제품이 생각보다 효용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면 소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혁신적 소비자에 의해 불타오른 시장이 후속 소비 지연으로 나타나는 소비정체 또는 단절 현상이 캐즘이다.
배터리 전기차에서도 캐즘이 나타날 조짐이 보인다. 이 차가 등장했을 때 혁신적 소비자들이 열렬히 반응했다. 정부 보조금이 큰 몫 했다. 하지만 후속 소비자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충전 인프라 부족, 충전 시 과다시간 소요, 정부 보조금 감축, 전기차 화재에 대한 미디어 보도 등이 염려를 키웠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대다수 소비자들이 소비패턴을 바꿨다. 내연기관차의 연장인 하이브리드차나 내연기관의 도움을 받는 플러그인차를 산 후 상황을 봐가며 배터리차를 구매하겠다는 거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22년에 비해 하이브리드차 판매가 52만5000대, 플러그인차는 12만4000대 늘었다. 배터리차는 54만대 느는 데 그쳤다. 유럽에서는 하이브리드차 169만5000대, 플러그인차 판매가 48만대 증가했다. 배터리차는 93만8000대 늘었다. 배터리차가 주종을 이루는 중국에서도 플러그인차 판매가 102만7000대나 늘었다. 배터리차는 251만7000대 늘었다. 소비자들이 배터리차의 대안으로 하이브리드차나 플러그인차로 상당수 갈아탔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차종이 아니었으면 모두 배터리차가 판매됐을 것이다. 최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의 위기 가능성을 언급하는 바람에 테슬라 주가가 왕창 떨어졌다. 본시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긴 하지만 배터리차의 글로벌 수요가 대체차종으로 인해 줄어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유럽에서는 정부가 나서 태클을 걸기도 한다. 독일이 앞장서고 있다. 이 나라는 자동차 시장이 전기차 시장으로 변화하는 추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연기관차 생산중단 시점을 늦추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영국은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중단 시점을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췄다.
여기에 미중 패권다툼 속에서 중국이 배터리차에 필수인 희토류 수출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배터리 생산이 어려워져 배터리 전기차 보급속도가 더 느려질 수 있다. 캐즘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반영되면서 배터리 관련 주식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하지만 배터리 전기차로의 이행은 정해진 수순이다. 최대 시장인 미국의 의지가 강하다. 미국에서 충전기 표준화 작업이 마무리된다면 캐즘 극복은 글로벌 수준에서 탄력을 받을 것이다. 한국 배터리와 중국 배터리와의 싸움도 큰 문제는 아니다. 미국은 중국산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유럽도 장벽을 높이려 한다. 이들 나라에 상당한 투자를 한 한국 기업들이 유리하다. 걱정은 희토류다. 한국은 전기차 영구자석용 희토류의 86%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이 배터리 음극재용 흑연 수출조절을 시사했다. 이런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국 배터리 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