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가 빠진 엔저의 함정
수출 기업만 환호, 서민 지갑은 더 얇아져
"그냥 기시다가 싫다"
차기 총리 거론 시작
수출 기업만 환호, 서민 지갑은 더 얇아져
"그냥 기시다가 싫다"
차기 총리 거론 시작
【도쿄=김경민 특파원】 33년 만에 엔화 가치가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일본의 수출 실적은 사상 최대를 기록 중이다. 외국인 관광객 숫자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웃돌 만큼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이 30년 장기 침체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이를 주도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인기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지긋지긋한 불황 고리를 끊어낸 총리와 일본 사회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기시다가 빠진 엔저의 함정
26일 재무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4~9월)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는 전년 동기대비 3배로 급증한 12조7064억엔(약 110조원)을 기록했다. 이는 반기 기준 사상 최대 수준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원유 가격의 급등이 일단락하면서 수입액은 51조엔이나 줄어든 반면 엔저(엔화가치 하락) 효과를 본 수출액은 50조엔이나 늘어난 덕분이다.
'물'이 들어온 수출 기업들은 열심히 '노'를 젓고 있다. 대표적으로 업계 1위 도요타자동차는 연간 순이익 지난해보다 60% 이상 많은 약 4조엔을 벌어들일 것으로 전망된다. 역대 최대였던 2022년(2조8501억엔)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이다.
'값 싼 일본'은 전세계 관광객들도 끌어 모으고 있다. 지난 10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251만6500명으로 코로나19 확대 이전인 2019년 같은 달보다 0.8% 많았다. 전년 동기 대비로는 5배나 웃도는 수치로 월별 방일객 수가 코로나19 이전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9월 관광 관련 소비 총액은 1조3904억엔(약 12조원)으로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 짭짤한 관광 수입도 올리고 있다.
거시 지표만 보면 기시다 총리는 일본을 구한 영웅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자고 일어나면 최저치를 갈아치우기 바쁘다.
지난 17~19일 요미우리·아사히·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자민당이 재집권한 2012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21~25%에 그쳤다. 역대 내각의 사례를 볼 때 당장 퇴진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지율이다.
기시다 내각의 처참한 인기는 민생의 부담이 커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장기 침체가 계속된 지난 30년간 일본인들은 임금도 물가도 변동이 없는 '제로(0)'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원자재값 급등으로 일본도 물가가 3~4% 뛰기 시작했다. 이를 임금이 올라 받쳐줘야 하지만 더딘 인상폭으로 실질 임금은 17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엔저로 물가가 오르면서 올해 1~8월 일본 엥겔지수(가계 소비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는 평균 27.3%까지 뛰었다. 코로나19 여파가 있었던 2020년을 제외하면 1980년대 초반과 비슷하다.
'엔저는 좋고, 엔고는 나쁘다'라는 게 상식이었으나 막상 마주한 슈퍼 엔저의 현실에선 기업들의 살만 찌우고, 정작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나쁜 엔저' '슬픈 엔저'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그냥 기시다가 싫다" 잠룡들 꿈틀
지속된 사건사고와 스캔들도 기시다 내각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시다 내각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마이넘버카드'의 행정 오류 사태로 "능력이 없다"는 비판을 맞았다. 방위비 증액을 이유로 증세를 결정한 지 1년도 안 지나 지지율 회복을 위해 감세로 정책을 튼 것 역시 스스로 신뢰를 깎아내렸다.
인사 실패에 대한 책임은 더욱 무겁다. 지난해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살해한 남성이 모친의 가정연합 헌금을 범행 동기로 밝힌 이후 교단의 고액 헌금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가정연합에 연루된 각료가 사퇴했다. 올해 9월에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개각을 단행한 지 두 달도 안 돼 차관급 인사 5명이 추문에 휩싸였고 이 중 3명이 벌써 사임했다.
최근에는 자민당 내 5개 파벌이 정치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보고서에 기록을 누락하거나 이를 허위기재한 의혹이 정치권에서 제기됐다.
이즈미 겐타 입헌민주당 대표는 "정책도, 인사도 총체적 붕괴"라고 비판했고, 모리야마 유타카 자민당 총무회장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기시다 내각이 유지됐던 것은 '포스트 기시다'가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요즘 차기 총리 후보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
지난 22일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이 주도하는 초당파 모임 '라이드 셰어 연구회'가 발족했다. 여당인 자민당·공명당, 야당인 입헌민주당·일본유신회 등 소속 의원 40여명이 참여했다. 특히 이 모임은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배후에 두고 있어 내년 가을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정지 작업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기시다에 패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도 최근 연구회를 만들어 세력을 넓히고 있다. 현직 장관이 총리에게 반기를 든 모양새로 주목을 받았다.
산케이신문은 지난 11~12일 차기 총리 후보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15.2%)이 1위를 차지했고, 고노 다로 디지털상(11.6%), 고이즈미 전 환경상(9.7%), 스가 전 총리(8.8%),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6.2%)이 뒤를 이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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