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전에, 미니멀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도널드 저드(1928~1994)는 정작 자신을 미니멀리스트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이란 용어가 최종적으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노력이 간과된 느낌을 준다는 점과 자신의 작품을 매우 엄격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한 그에게 미니멀리즘이란 단어의 '단순함'이란 느낌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규정했던 독특한 분류, 즉 그가 명명한 '특정한 사물'(Specific Objects)“로 불러줄 것을 원했다. 1970년대 조각의 의미를 확장시킨 '특정한 사물'이란 말은 저드가 1964년 발표한 에세이 제목이다.
여기서 저드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은유적 상징보다는 사물의 물리적, 현상학적 경험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의 골격을 제시했다. 그는 새로운 3차원 작업이 하나의 사조, 유파 또는 스타일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하나의 사조로 정의하기에는 공통적인 측면이 너무 일반적이고 작기 때문이며 차이점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기 작품이 갖는 독특함과 복잡성에 대한 믿음이 컸다. 특히 회화는 회화고 조각은 조각이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관념을 부정하면서 아연도금철판,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황동, 그리고 구리와 같은 산업용 재료를 사용하며 특히 작가의 작업실이 아닌 공장에 주문 제작함으로써, 제작보다 개념을 중시하면서 당시 떠오르던 개념미술(Conceptual Art)에도 고무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공간 자체를 작품이 지닌 산업적 마감으로 균질한 표면과 함께 작품의 필수적인 요소로 취급했다. 따라서 작품과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저드 작품의 독특한 특징이다. 특히 그는 의미를 지닌 특정한 형태, 즉 정육면체 등을 거부하고 중성적 형태를 통해 미니멀리스트와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다. 또 70년대 시작한 가구 제작은 예술과 기능적 디자인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그의 가구와 조각은 사물의 구체적인 성격, 공간성, 관객과의 관계를 탐구한다. 한때 작가는 “작품은 생각하는 것만큼 강력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실제 공간은 평면에 그린 그림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구체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왜 그가 다른 미니멀리스트와 자신을 구별하려 했는지 알려준다. 그는 모든 것이 배제된 감정 없는 작품을 위해 자기 지시적 흔적에 의지한다.
자체적으로 서있고, 물리적 존재 이상의 어떤 것도 암시하지 않는 물체를 만들고자 했던 저드는 미 공군 공병대 일원으로 대구(1946~47년)에서 군 생활을 하며, 당시 접했던 한국의 약장이나 가구에서 본 ‘서랍’을 뜻하는 사투리 ‘빼다지’가 자기 작업의 토대가 되었다고 술회할 만큼 우리와 친숙하다.
이후 귀국한 저드는 컬럼비아대에서 철학과 미술사,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1959년부터 6년간 미술평론가로 일했다. 이후 작가로서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에 집중했다. 위계도 없고 기존 관념도 없는 다른 차원의 시선, 공간적 지평, 현존과 비가시성, 숭고의 경험 아니면 삶의 신비라고 부를 영역에서 작업했다.
그 후 1991년 대구 인공화랑 전시로 한국에 와 한지에 빠져 이를 구입해 가 목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86년에 문을 연 41만평 규모의 그의 미술관이자 미니멀리즘미술관인 텍사스주 마르파에 위치한 치나티재단(Chinati Foundation)이 그를 기억하게 한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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