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중국이 띄운 정찰용 풍선으로 의심되는 물체가 미국 영공에 침입했다가 격추된 게 방아쇠였다. 가뜩이나 경색된 미중 관계는 신냉전 체제를 방불케 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 물론 대만을 둘러싼 양국의 신경전도 깔려 있었다. 이후 미국은 첨단 기술분야에서 화력을 집중했다. 미국산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는 '칩스법'이 본격 시행되자 삼성과 SK가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한국 기업들의 중국 반도체공장은 장비 수입유예를 받았다. 다만 시한부 조치다. 게다가 극자외선(EUV) 같은 미래 첨단공정의 핵심장비는 제외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공장의 공정 선진화는 발목이 잡힌 셈이다.
2차전지는 상황이 더 나쁘다. 배터리 보조금 지원이 핵심인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본격화되자 중국과 협력하는 다른 나라 기업들까지 치명타를 입었다. 특히 이달 초 발표한 IRA 세액공제 제외대상인 '외국우려기업(FEOC)' 세부규정은 국제 통상분야의 '팍스 아메리카'였다.
이 규정은 2025년부터 중국산 핵심광물을 사용하거나 중국의 합작사 지분이 25% 이상이면 미국의 보조금을 못 받는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중국과 추진 중인 10여개의 합작 프로젝트 계획을 모두 수정해야 한다. 중국은 통상 합작사 지분을 50% 이상으로 유지하려 한다. 향후 기술이전 등 주도권 확보를 염두에 둔 조치다. 이를 25%로 제한하면 합작계획 자체가 백지화될 수 있다. 칩스법이나 IRA 모두 21세기 미국의 완결된 패권주의의 결정판이다.
중국도 리튬, 흑연 등 막강한 지배력의 희토류를 무기화하고 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은 역부족이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양국 핵심 관료들이 왕래하는 등 관계회복 기미도 엿보인다. 우리 산업계와 기업들엔 '희망고문'일 뿐이다. 관계개선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미중 갈등의 핵심은 결국 자국 보호주의다. 자국 경제와 산업의 위협을 제거하고 부흥을 이끄는 게 최고의 선(善)이다. 이 과정에서 협력관계의 타국 기업들은 언제든 희생양이나 볼모가 된다.
특히 중국의 산업 자급화는 우리 수출경제가 직면한 최대의 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까지 대중 수출액이 1140억달러인데 수입은 1320억달러라고 한다. 180억달러(23조원)의 무역적자다. 12월 대중 무역수지 개선도 어려운 상황이다. 31년 만에 대중 무역적자가 눈앞이다. 중국은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무역의 보루였다. 한국산 중간재 수출의 최대 시장이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부품, 석유화학, 철강·조선 등 우리 대표 산업들이 중국과의 공급망 관계를 통해 급성장해 왔다. 그랬던 양국의 산업구조가 붕괴되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첨단 디스플레이 같은 일부 초격차 제품 외에는 대부분 산업 자립화를 완성했다. 최근 만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엘도라도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지금도 노력하지만 '포스트 차이나' 전략을 수출정책의 최상위 과제로 삼고 똘똘 뭉쳐야 한다.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택했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이 바라보는 지금의 한중 경제관계에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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