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한 대로 사업은 풀리지 않았다. 적잖게 팔리긴 했지만 적자는 누적됐고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쉬던 장학엽은 다른 양조장을 인수해 다시 진로를 생산했다. 증류식 소주를 고집하며 연구 끝에 쓴맛이 나는 흑국(黑麴·빛깔이 거무스름한 일본식 누룩)소주를 개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최초로 소주를 유리병에 담아 팔아 또 한 번 히트를 쳤다. '되'나 '말' 단위로 술을 팔던 때였다. 진천양조상회는 1934년 한 해 3000석의 술을 생산하는 대규모 양조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6·25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장학엽은 맨몸으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한 소주회사와 동업하며 사업을 키웠지만 쫓겨나는 아픔도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영등포구 신길동 5200㎡쯤 되는 터에 소주공장을 세워 재기를 도모했다. 이름은 서광주조였다. ㈜서광이라는 최초의 계열사도 창립했는데 지금도 보스렌자 등의 브랜드를 생산하는 서광모드로 남아 있다. 1954년 7월 두꺼비표 진로가 처음으로 시장에 나왔다. 남쪽에서는 원숭이를 교활한 동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두꺼비로 마스코트를 바꿨다.
당시 서울에서는 '명성' '백마' '청로' 등 소주업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장학엽은 진로소주를 리어카와 자전거에 싣고 길거리를 누볐다. 물불 가리지 않는 영업전략과 톡 쏘는 맛으로 진로는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불과 4년 뒤인 1958년 판매량이 10배나 뛰었다. 1963년에는 항공기를 전세 내 진로소주병을 매달고 비행하는 이색 광고전도 펼쳤다.
1960년대를 주름잡은 소주는 목포의 삼학소주다. 가짜 삼학소주까지 나올 정도로 잘 팔렸고, 가수 남진의 부친도 경영에 참여했다고 해서 유명했다. 삼학소주는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은 끝에 부도를 냈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진로에는 좋은 기회가 됐다. 1970년이 되어 진로는 마침내 소주시장 왕좌를 차지했고, 이후 한 번도 아성을 놓치지 않았다. 병뚜껑 속에 경품을 넣어 주당들이 뚜껑을 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작전도 주효했다(사진은 코로나 승용차 3대를 내건 조선일보 1971년 8월 21일자 광고).
경영에서 물러나 서울 우신중·고교를 세우고 재단 이사장을 맡던 장학엽은 1985년 폐암으로 사망하고 아들 장진호가 사업을 맡았다. 그는 1989년 본사를 신길동에서 서초동으로 옮기고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건설, 백화점까지 사업영역을 넓히며 한때 재계 순위 20위 안에 들기도 했다. 무리한 확장은 화를 불렀다. 외환위기가 닥쳤고 2004년 법정관리에 들어가 진로소주는 장씨 일가의 손에서 벗어났다. 진로는 하이트맥주가 인수, 현재 '하이트진로' 산하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2003년 장진호는 사기대출 등으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캄보디아로 가서 부동산, 카지노 등 여러 사업에 손댔다. 2010년 중국으로 옮겨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다 2015년 4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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