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장기기증을 가리켜 삶의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 기적 같은 여정을 지켜보고 함께해 온 이들이 있습니다.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기적'의 경험을 공유하고 나누는 데 앞장서 온 사람들입니다. <뉴스1>은 지난 추석부터 시작해 신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말하는 '장기기증'의 순간을 전해드립니다.
(서울=뉴스1) 임윤지 기자 = "솔직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감히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감정은 선명해요."
이미 오래전부터 B형 간염을 앓아오던 강옥예씨(68)는 어느 날 처음 느껴보는 열기운, 남산만큼 부어오르는 배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처음엔 '뭘 잘못 먹었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점 커지는 진통에 대학병원을 찾았다. 알고 보니 간 상태가 악화돼 간경화에 걸려 이식이 시급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며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삶을 포기했다. 그래도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혼자 마음을 추스른 강씨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렇게 3달, 4달이 흘렀을까. 강씨에게 2018년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바로 간 이식을 받게 됐다는 것.
국내법은 심정지가 아닌 뇌사자만 장기이식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평균적으로 매년 400명의 뇌사자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간 이식 대기자만 6000명이 넘는다.
가족 중에 기증자를 찾아보기도 했다. 유일하게 큰사위 간을 이식받을 수 있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강씨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런 강씨가 이식받기에 딱 적합한 간 기증자가 나온 것이다. 의료진도 "이런 천운이 또 없다"며 축하해줬다고.
기증자에게 보답하는 길은 뭘까. 고민 끝에 강씨는 '생명의소리' 합창단에 들어갔다. 이 합창단은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과 누군가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떠난 유가족 등으로 구성됐다. 원래 노래를 좋아하던 강씨는 장기이식을 받고 유가족에 감사한 마음을 노래로 보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식을 받고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거치며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았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씻는 것도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을 또 힘들게 한다는 미안함이 들었지만 기증자와 그 가족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텼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기증자 가족을 찾아가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현행법상 장기기증인 유족과 이식 수혜자가 서로 알 수 없도록 정보 제공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씨는 합창 외에도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어느덧 누적 봉사시간이 4000시간이 넘었다. 또 그녀는 시간 날 때마다 기타 연주하는 남편과 함께 노래를 부르러 다닌다.
강씨는 "다들 아픈 기억이 있지만 슬픔을 잊고 노래한다는 게 너무 좋아요"라며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노래라 좋기도 하고, 이분들의 마음도 헤아려보는 계기가 됐죠"라 말했다.
◇장기기증 유족과 수혜자가 함께 부르는 세상의 단 하나뿐인 하모니
"너의 사랑이 나를 일으킨다. 보고파 널 부르다 목이 멘다"
한겨울에도 제법 포근했던 지난달 13일 경기 의정부 성모병원에도 생명의소리 합창단원의 감미로운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꿈에'였다. 올해 장기기증 주제곡이기도 하다. 노랫말은 2021년 장기기증으로 5명의 환자에게 생명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난 고 이학준 군(당시 17세)의 어머니 이소현씨가 직접 썼다. 이씨 역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느껴주길 바란다는 지휘자의 말과 함께 노래가 시작됐다. 시끌벅적하고 분주하던 환자와 의료진들은 노래가 울려 퍼지자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장기기증 유가족과 수혜자들이 모인 이 합창단은 사실 악보 하나 읽을 줄 몰랐던 일명 '아마추어'들이다. 그런데도 생명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정성껏 부르는 노랫말에 환자와 병원 방문객들은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환자 보호자와 의료진도 가던 길을 멈추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병원에 부모님 모시러 온 30대 여성 이자원씨는 "병원을 기분 좋아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면서 "오늘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았고 또 장기기증을 받고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기증을 선택한 가족들 모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수혜자는 또 다른 가족…건강하고 행복하길"
"얼마 전부터 아내가 저와 결혼하고 제일 잘한 일이 '딸 장기기증'이래요. 근데 얼마 전에 칭찬거리가 하나 더 늘었어. 바로 합창하는 것"
고 송아신씨(당시 34세) 아버지 송종빈씨(69)에게도 '합창'은 남다른 의미다. 2013년 아신씨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에 빠졌다. 당시 장기기증을 둘러싼 인식이 부족했던 때라 초반엔 아내의 반대가 컸다. 하지만 생전 딸의 의사를 존중해 송씨 부부는 장기기증을 선택했다.
처음엔 아빠로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는 송종빈씨. "바르게 살다가 오세요" 딸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은 송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장기기증 유가족과 각자만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합창단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장기기증과 관련된 분들의 모임이다 보니 유대감이 남다르다"며 "함께 노래하다보면 '우리 딸도 어디선가 잘 지내겠지' 생각에 위로받는다"고 말했다.
장기 이식을 받은 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송씨는 딸도 하늘에서 기뻐할 거라 했다. 평소에도 아신씨는 모교 후배를 위해 대학 등록금을 기부하는 등 주변에 늘 베풀었다. 송씨는 지금도 딸의 뜻을 이어받아 딸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매년 책을 적게는 수십 권에서, 많게는 수천 권까지 보내고 있다.
유가족들은 마지막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 말한다. 매년 장기기증과 관련한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며 그리움과 고마움을 담는다는 합창단원들.
장기기증 유가족들은 이식받은 가족이 더는 미안해하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길 바란다고 했다.
고 이학준군 어머니 이소현씨는 "심장을 받은 친구는 소아청소년과에서 수술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우리 학준이 같은 아이겠죠? 회복기 잘 거치고 있다고 들었어요. 갈수록 정말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미소를 보였다.
송종빈씨도 수혜자들의 행복을 비는 건 마찬가지. "우리 딸 신장은 10년 동안 투석해온 23살 여대생한테 갔다고 들었어요. 지금쯤 우리 딸 나이가 되어있겠죠?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들은 수혜자들을 마음으로 낳은 가족이라 표현했다. 새해에도 이들은 먼저 떠난 자신의 가족과 새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가족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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