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기고

"어제의 삶보다 나아지길" 똑같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작가와의 대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16 18:44

수정 2024.01.16 19:56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 무릎을 꿇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어제의 삶보다 나아지길" 똑같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작가와의 대화]

젊은 날 내 글에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라고 썼다. 그런데 맞다. 안으로 쌓으며 넓이보다는 깊이를 생각하는 것이 노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도무지 지혜라는 것이 한페이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생각하면 떨리고 부끄럽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나는 '개선'을 생각한다.


말을 줄이려 한다. 할 말은 꼭 하되 안 해도 될 말을 가려 침묵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다.

지난해에는 적당한 양의 일들이 있었다. 강의며 글이며 모임이며 사회를 보는 일도 '그만하면'이라는 적응력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깜빡 잊은 것이다. 지금의 내 나이에는 조금 과한 무게였던 것이다. 거기다 책을 세권이나 태어나게 했으니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무서운 독감을 몇 번 앓았다. 열흘 만에 세수를 했다. 빈번히 앓는 감기 중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일의 무게와 나이의 균형을 잃은 것이었나 보다

10년 전만 해도 감당이 어려운 강의를 지방마다 다녔다. 꽉 찬 군중의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박수 받을 때 가장 외롭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강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마음이 허탈하고, 왈칵 외로움이 밀리고 쓰라려서 대낮에도 술 한 모금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내가 관객들의 열광하는 박수 소리에 함몰되어 과장법과 연기로 남에게 헛된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되고, 관객들의 눈물에 오히려 내가 유혹되어 슬픔을 키우고 있는 감상주의 유발자는 아닌지 반성하게 되고, 박수 소리를 등으로 받으며 무대를 내려오면 왠지 온몸이 가려울 때도 많았다. 거울 앞에 서면 혀에 불을 붙이고 달리는 붉은 말을 보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강의하고 어머니가 취하면 부르던 노래를 한 곡조 부르고 나면 땀이 흐르면서 나는 쓸쓸함의 극치에 도달할 때도 많았다. 아마도 어느 곳에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을 그렇게 무대에서 풀어 버리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강의의 핵심에는 '개선'이라는 낱말이 뚜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웃음이나 재미로 끝나는 강의는 나는 원치 않는다. 내 강의 끝에 '나도 변하고 싶다'의 변화 유발을 나는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므로…. 나는 새벽에 똑같은 기도를 한다. 이것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만약 이른 새벽에 나가야 하는 매우 급한 상황이라면 세수를 할 때, 화장을 할 때도 입으로 중얼거린다.

"어제의 삶보다 오늘의 삶을 더 개선하게 하시고 그 개선하는 과정에서 절망과 실패가 있더라도 그 절망과 실패를 잘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이지만 나 자신과의 새벽 약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도할 때 나와 함께하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이 기도는 내 삶의 뼈대이지만 이 뼈대에 살을 붙여가는 것이 곧 나의 삶이다. 나이는 부드러운 채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처럼 바람처럼 나를 치지만 나를 깨어있게 하는 스승 같은 존재다.

젊은 날에는 나이라는 것이 짐스러웠다. 너무 뜨거워서, 너무 솟구쳐 올라서, 너무 호흡이 빨라서 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실수가 많았고, 시간 낭비가 많았고, 스스로 자신을 손상시키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 젊음은 더러 자신을 훼손하기도 하는 것이지, 그러나 다 지나갔다고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이제는 또 다른 축복이 왔다. 느슨하고 깊어진다. 갈팡질팡하지 않고 더러 감정의 파도가 와도 이내 잠잠해진다. 그것이 좋다.

젊은 날 내 글에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라고 썼다. 젊었으니까 해 본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맞다. 지금은 아름답지 않은 인생이 없다. 바닷가 해녀의 굵은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인생이 있어, 아름답고 잘 다듬은 교양 있는 노인에게서 고요함을 배워 좋다. 조금 부족하다고 덧대고 다시 덧대면 누추를 면치 못하는 거 아닌가. 그 대신 안으로 쌓으며 넓이보다는 깊이를 생각하는 것이 노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노인은 누구나 한 권의 책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런 말을 하다 보면 다시 두렵다. 내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도무지 지혜라는 것이 한 페이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생각하면 떨리고 부끄럽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나는 '개선'을 생각한다. 저녁에 죽어도 아침에는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일…. 그런 흐름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제부터 팔십의 새로운 '개선'이 필요하다. 끝은 알고 싶지 않다. 과정이 소중하다. 어디쯤에서 딱 서더라도 상황 수용에 최선을 다하겠다. 더 읽고, 더 인사 많이 하고, 자신에게도 인사 잘하고, 너그러워지고, 자연에 감사하고, 예술혼을 마시며 모든 존재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이 매끄러웠으면 좋겠다. 쉽지 않으리라. 그 고비를 지금부터 서서히 넘으려고 한다. 기도로 노력으로 말이다

며칠 전 임윤찬의 영화 '크레센도'를 봤다. 18세의 나이에 80의 고즈넉함과 20세의 불타는 연주로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다. 그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내 볼 위로는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말한다. "미국은 자연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시간이 없어요. 피아노 앞에 앉아야 하니까요." 모든 시간을 바치면서도 오직 몰입, 몰입, 몰입만을 따라가다 솟구친다. 거기 스며들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아티스트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도 한다. 그 말의 끝장을 따라가느라 온몸이 바글바글 끓고 재가 되어 흘러내리게 한다.
예술은 불의 영혼이다. 그의 몰입과 절정을 따라가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파이낸셜뉴스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아니 넘치시기를.

신달자 시인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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