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종업원을 300명이나 거느리고 볼트 너트 업체를 운영할 정도로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귀국, 서울 영등포에 경성정공이라는 자전거 제조업체를 차렸다. 몇 년 후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제작설비를 끌고 가 영도대교 근처에서 자전거를 만들며 열정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서울로 돌아와서는 1952년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바꾸고, 최초의 국산 자전거인 '3000리호'를 선보였다. 이 이름이 현재의 삼천리자전거로 이어진다.
자전거를 만들던 기아는 오토바이와 함께 삼륜차에 눈을 돌렸다. '딸딸이' '삼발이'로 불리던 낮은 출력의 삼륜차는 쌀과 연탄을 싣고 좁은 골목길을 누비던 서민용 화물차였다. 지금도 동남아에서는 '툭툭'(태국), '바자이'(인도네시아) 등으로 불리는 삼륜택시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이 1934년부터 동남아에 삼륜차를 수출한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기아는 일본 마쓰다 모델을 들여와 최초의 삼륜차 'K-360'을 1962년 출시했다. 배기량이 356㏄에 지나지 않는 미니 화물차였다. 당시 경영난을 겪던 기아에 삼륜차는 내보낸 사원들을 불러들여야 할 정도로 효자상품이 됐다. 'T-600' 등 후속 모델도 내놓았다(동아일보 1969년 12월 11일자·사진).
삼륜차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보기에도 위태로웠는데, 실제로 전복사고가 많았다. 큰 차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전파되어 교통을 마비시키기 일쑤였다. 1990년대에 4륜인데도 차체가 높아 전복사고를 많이 냈던 '다마스'와 '라보'라는 경상용차의 경우와 비슷했다. 1972년 정부는 삼륜차의 고속도로 진입을 금지했고, 그 여파로 2년 후 단종됐다. T-600 1대는 2008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1957년 경기 시흥(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지은, 3000리호 자전거를 만들던 기아 공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1973년 준공된 시흥 소하리 공장(현 오토랜드 광명)은 일괄생산 체제를 갖춘 국내 최초의 자동차 공장이다. 이곳에서 브리사를 비롯한 초창기 기아의 승용차들이 생산됐다. 김철호는 지병을 얻어 아픈 몸을 이끌고 소하리 공장 건설현장을 돌아보다 준공 직후인 그해 11월 6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업은 장남 김상문이 이어받았고 1974년 승용차 브리사를 내놓았다. 마쓰다 패밀리아(3세대)를 기초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든 세단 승용차였으며, 현대 포니와 함께 당시 가장 잘 팔린 차이기도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가 몰던 그 차량이다. 기아는 유럽의 승용차 기술을 받아들여 '피아트' 모델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승용차 제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은 어려움에 빠졌고, 이를 '봉고 신화'로 타개한 사람이 입사 1기 사원 출신인 전문경영인 김선홍이었다. 김선홍은 오랫동안 기아를 이끌며 키웠지만, 외환위기 때 현대차그룹에 인수됐다.
삼천리자전거는 1979년 기아에서 분사하여 독립했고, 1985년에는 완전히 분리됐다. 그래도 삼천리자전거는 외환위기 전까지 범기아그룹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합병된 기아는 김철호라는 존재를 잊었지만, 삼천리자전거 사람들은 창업자 김철호를 받드는 분위기라고 한다. 현 삼천리자전거 회장은 김철호의 손자인 김석환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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