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저주'란 말이 있다. 사람이 무엇을 잘 알게 되면 그것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운전은 절대 가족에게 배우는 게 아니란 말이 있는데 '지식의 저주'에 걸린 형, 오빠가 초보인 동생에게 '극대노와 짜증'을 퍼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자 그 누구도 초보운전 시기를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단 운전에 능숙해지면 운전을 처음하는 사람이 겪는 육체적, 심리적 어려움에 공감하기 어렵다. 주식도 비슷하다. 누구나 다 '주린이' 시절을 거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린이 시절의 고통과 시련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환주의 개미지옥] 1~2화를 통해 '한국 주식이 미국 주식보다 후진 5가지 이유'를 쓰면서도 주식투자자에겐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온라인 댓글과 현실 피드백을 통해 여러 긍정적인 반응을 받으며 어쩌면 나조차 '지식의 저주'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새삼 반성하게 됐다. 앞으로도 실전투자 5년 차 (망한) 개미의 가감 없는 독백은 계속된다.
주식과 운전의 다른 점도 있다. 운전은 가르침을 통해 초보의 운전 실력이 향상되면 도로에서 사고가 날 확률이 줄어들고, 결국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황이 된다. 하지만 주식을 잘 하는 방법(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은 그것을 가르쳐 줄 경우 그 노하우를 알고 있던 사람의 실익이 줄어들 우려가 있다. 주식 시장의 본질은 "싼 가격에 주식을 사서 그것을 더 비싼 가격에 판다"인데 모두가 다 주식의 본질에 대한 정보에 능통하게 되면 그것이 어려워 지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에서는 멍청하게 비싼 가격에 주식을 사더라도, 나보다 더 멍청이에게 더 비싸게 팔면 그만이다.
주식 시장에서 정보의 독점과 과점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나 혼자만 레벨업'인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 있는 정보를 다수와 나누기 싫어진다. 개미지옥을 파고 기다리는 '그들'은 대중이 더 멍청해 지길 바란다. 중고차 시장, 의료 사고 분쟁 등에서 정보를 상대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보가 적은 사람을 호구처럼 이용하기 쉬워진다.
'그들'은 알았던 부동산 투자의 비밀
지난 정부 시절 국토교통부와 건설사를 취재하는 부동산부 기자를 했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은 전형적인 부동산 상승기로 정부가 서른 번에 가까운 부동산 규제를 발표하며 집값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시중에 풀린 유동성(돈)과 저금리를 기반으로 부동산 투기 수요에 불이 붙으면서 사상 유례없는 집값 상승이 이어졌다. 또 전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자율 0%의 대출, '전세' 제도가 있는 점도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기자는 한 두 달이 멀다 하고 국토부의 부동산 규제 보도자료가 나오면 이를 기사로 정리했다.
매번 정부가 심혈을 다해 준비했다는 부동산 대책 기사를 쓰면서도 기자의 마음속에서는 '정부가 처음부터 극약처방을 통해 집 값을 잡는 대책을 내놓기 보다, 집값 상승을 용인하면서 집이 있는 부자들이 비싼 값에 다 팔고 나갈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런 의구심이 들게 하는 실제 사례는 차고 넘쳤다. 언제나 규제를 한 발 앞서 피해가며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으로 꽤 많은 자산을 축적한 사람이 주변에도 있었다. '정보'를 가지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넘치는 유동성을 활용하고, 규제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자산을 불려 나갔다.
정부가 미친 듯이 오르는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대책은 대출 규제였다. 서울과 수도권 등에서 주택담보대출 비율을 40%까지 낮췄다. 종전에는 10억짜리 집을 사는데 6억(60%)까지 대출이 나왔는데 4억(40%)까지로 줄어들었다. 부부 모두 대기업에 다녀 소득이 높고 상환능력이 충분한 신혼부부도 낮아진 대출 한도로 인해 서울에는 집을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출 규제에도 허점이 있었다. 개인에 대한 대출 규제는 있었지만 '법인(회사)'에 대한 대출 규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던 A씨는 이를 노려 부동산매매 법인을 세웠다. 법인 명의로 대출을 80%~90% 가까이 받아 서울 알짜 지역에 있는 10억원대 아파트를 샀다. 은행 입장에서는 새로 생긴 법인의 경우 매출이나 실적 이력이 없기 때문에 대출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 부동산 상승기였고 법인의 대표가 고소득 전문직이었기 때문에 대출이 나왔다. A씨는 2년 뒤 법인 명의로 산 해당 아파트를 팔아 수억원의 매매 차익을 거뒀다. A씨가 해당 아파트를 사기 위해 투자한 돈은 1~2억원 남짓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A씨가 아파트를 사고 6개월 정도 지나자 정부에서는 뒤늦게 법인에 대한 주택담도대출 규제도 시행했다. 이미 '법인을 세워 풀 대출을 받고 아파트를 살 사람들은 다 산 뒤'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로 촉발된 미국 금융 시장의 폭락 이야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의 한 장면과도 겹쳐 보였다. 영화 속에서는 0%대의 기준 금리를 유지하는 미국 은행이 대출을 남발하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이 100%에 가까운 대출로 집을 사고, 그 집을 담보로 또 집을 사고, 다시 그 집을 담보로 또 다른 집을 사는 상황이 나온다. 추세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므로 은행들은 100% 가까운 대출을 남발하며 거품을 형성 시켰던 것이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은 대출 회수 확률이 적어 신용등급이 낮았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 기술자들은 이 채권을 수천, 수만개 모아 또 다른 파생금융상품(CDO)을 만들고 유동화 시켰다. 1개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될 확률은 높지만 이를 1만개 모으면 부실확률이 낮아진다는 기적의 논리였다. 미국의 신용평가사들은 미국의 은행들과 짜고 이 금융상품에 트리플 A 신용등급을 부여했다. 당시 미국 은행들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른 나라의 은행에 이 상품을 팔았다. 향후 미국 은행이 파산하고 해당 상품을 산 국내 은행들은 막대한 손실을 껴안았다. 당시에는 이 금융상품을 산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이 '개미'였고 미국의 금융기관이 '그들'이었던 것이다.
(계속: 20일 오전 11시 노출 예정인 4화로 이어집니다.)
#이환주의 개미지옥 #부동산 #빅쇼트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