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송재림 출연
[파이낸셜뉴스] "어떤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홀로 서야 해요. 난 당신의 와이프가 아니에요.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모르지만, 나는 자유예요."('인형의 집' 노라 대사)
145년 전 초연된 연극 ‘인형의 집’ 결말은 지금 봐도 진보적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 높아졌지만, 아직도 생계문제로 이혼을 선뜻하지 못하는 기혼녀가 존재한다. 비단 경제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명성이 높은 부자 남편과 세 아이를 놔두고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노라는 사회적 약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존재를 상징한다.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이 끝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연극 ‘와이프’는 시대를 앞서간 노라의 정신을 재조명하는 연극이면서 동시에 연극의 존재 이유를 묻는 작품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네 개의 시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신선하고 재밌다. 1959년에는 불가능했는 일이 현재에는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삶은 녹록치 않다.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실패의 씨앗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소녀시대 수영이 출연하는 바람에 최근 서현이 연극을 보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좀 약간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후기를 밝혔다. 그는 "이렇게까지 어려운 연극이었나? 지능을 의심했다. 이게 맞는거야? 나 이렇게 이해를 못해"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와이프'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시간적 무대와 인물을 다뤄 다소 복잡한 구조를 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두 개의 시간(1959년과 1988년)과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2046년)이 그것이다. 연극의 중심에는 여성 혹은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닌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이 있다. 노라로 대변되는 투쟁적인 인물과 그와 달리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인물 간 속사포 대화는 지적호기심을 자극하고, 우리사회가 이러한 두 가치관의 격렬한 충돌 속에 변화해왔으며, 지금 역시 현재진행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 개의 시간, 네 개의 무대
연극은 영화 '캐롤'처럼 동성애가 인정되지 않던 시대, 사랑에 빠진 연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959년 ‘러버 LOVER’의 두 주인공은 ‘인형의 집’에서 노라를 연기하는 배우 수잔나와 그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한 미술 교사 데이지다. 아내와 함께 수잔나의 분장실을 찾은 데이지의 남편은 수잔나를 노라와 동일시 하며 그녀의 마지막 선택을 비난한다. 그리고 남편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데이지는 수잔나에게 임신 소식을 전한다.
1988년 ‘파트너 PARTNER’에서는 1959년의 수잔나처럼 열정적인 아이바와 뒤늦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수줍은 남자 에릭이 이끈다. 팝에서 사람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유혹적인 발언과 몸짓을 하는 아이바는 치명적 매력을 뽐낸다. 하지만 갓 성인이 된 에릭은 1959년의 데이지처럼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싶고, 세상의 시선이 두려우며, 또 에릭의 열정이 벅차기만 하다. 28일 무대에선 송재림이 아이바를 연기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대사를 정확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전달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2023년 ‘허즈번드 HUSBAND'에선 젊은 커플인 클레어와 핀이 연극에 투자하기 위해 어떤 남자를 만난다. 알고 보니 클레어는 1988년 에릭의 딸이고, 그 어떤 남자는 아이바다. 클레어가 들려주는 아버지 이야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남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비극적인지 드러낸다. 또 사람마다 사회에 맞설 용기를 갖는데 필요한 시간이 다르며, 젊은 시절 저항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여기서 아이바의 배역이 기존 송재림에서 오용으로 바뀌는데, 풍파에 깎인 무딘 돌처럼 같은 인물이나 달라진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2046년 ‘앤드 AND’에서는 ‘인형의 집’ 공연을 마친 배우 수잔나에게 그녀의 팬인 데이지가 찾아온다. 무대는 다시 1959년 그대로고 인물의 이름 역시 같지만 그들의 관계는 다르다. 의학도지만 우연히 본 연극에 반해 배우의 꿈을 꾸는 데이지는 자신의 엄마에게 물려받은 탬버린을 수잔나에게 선물한다. 수잔나는 연극의 미래를 비관하나, 데이지의 결심은 굳건하다. 이 에피소드에선 특히 연극과 무대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과거의 여성, 지금의 성소수자처럼, 연극은 공연 분야에서 점점 입지가 좁아진다는 점에서 문화적 약자에 속한다.
신유청 연출은 “세상이 옳다고 말한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야말로 최전선에 선 인간들이 무대 위에 그려진다”고 연출의 변을 통해 밝혔다. 각 인물의 저항은 실패나 좌절로 끝이 나나,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비록 그들의 영혼에 균열을 내고, 상처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만, 다음 세대로 이어진 그 균열은 신 연출의 말마따나 “빛이 스며드는 통로”가 된다. “당시로서는 실패였지만, 실패는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은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자신이 “질문한 모든 집단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더 폭력적이며, 더 가망 없는 곳으로, 한마디로 더 극적인 곳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터를 통해 보면 ‘세상은 생각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고,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와이프' 역시 그렇다. 그렇게 점점 좋아지길 바라는 바람도 담겼다. 이 연극은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됐고, 같은 해 한국 초연에 이어 이번이 삼연이다. 제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2월8일까지 LG아트센터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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