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2010년 65세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1%를 넘기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20년에는 28.7%에 육박하며 10명중 약 3명꼴로 65세 노인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도 일본을 빠르게 따라가고 있다. 2023년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19%를 차지했다.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일본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상상력으로 그려낸 영화다. 하지만 그 상상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될 수 있는 디스토피아”(인디와이어) “이 영화는 풍자도, SF도 아닌, 현실적인 호러 영화”(로스앤젤레스 타임스)라는 평가를 얻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의 영예를 안았다.
‘플랜 75’는 75세 이상 노인을 상대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준다는 명목하에 정부가 ‘플랜 75’를 도입하고, 이 정책에 얽히게 된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와 20년간 연락이 끊어진 삼촌의 죽음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플랜 75’을 신청한 노인을 전화로 관리하는 콜센터 직원 ‘요코’ 그리고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 ‘마리아’가 그들이다.
영화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5번 2악장 안단테’가 우아하게 흐르는 가운데, 난장판이 된 어느 노인 시설에서 깜짝 놀라 뛰쳐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장총을 든 괴한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며 살인의 이유를 밝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 '격렬한 반대를 뚫고 ‘플랜 75’가 제정되었다'는 내용의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온다. 다음은 오는 7일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과의 일문일답.
―도입부 장면이 지난 2016년 7월, 일본에서 실제 발생한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흉기 난동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했으니까 완전히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26세 남성이 장애인은 사회에 필요하지 않고 살 가치도 없다고 했다. 이건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일본사회에 생산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조가 팽배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돼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또 플랜75가 사용하기 편리하고 아름다운 제도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살인사건만큼 잔악하고 폭력적인 것이라는 것을 묘사하려고 이 장면을 앞에 배치했다.
―해당 사건을 노인문제로 연결하게 된 이유는.
▲비단 장애인뿐 아니라 약자로 대변되는 고령자, 빈곤층, 중증환자 등에 대해 당신은 우리사회에 필요 없어요, 죽어도 괜찮아요, 라는 식으로 배제하려는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 ‘10년’에 먼저 선보였는데, 단편을 장편으로 제작하면서 달라진 점은?
▲원래 장편으로 기획한 영화인데 ‘10년’에 참가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 이후 ‘10년’의 프로듀서가 장편으로 만들자고 했다. 각본 작업을 하던 중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현실이 픽션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세상이 어둡고 불안한데 더 불안을 부추히는 영화를 만들면 안되겠다, 원래는 단편처럼 문제제기로 끝나는 영화였는데, 조금이라도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 만들자고 해서, (애초 기획보다) 희망적으로 바뀌었다.
―극중 70대 주인공 미치와 20대 콜센터 직원 ‘요코’가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인공 미치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으나 불온한 기색을 느끼면서 정면을 응시하는데, 관객과 눈을 맞추면서 이 영화가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요코는 처음에 별다른 생각없이 자신의 일을 하다가 미치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이 제도의 비인간성을 깨닫는다. 미치 뒤로 신입 콜센터 직원을 교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당신도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가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어 그런 장치를 썼다.
―미코와 요코의 전화 상담이 15분 지나면, 종이 울리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건 인간의 감정보다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회풍조를 반영했다. 일본에서도 가성비와 시성비가 유행인데, 감정과 같은 인간의 삶에 더욱더 중요한 게 정작 외면받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필리핀 배우로 보이는데, 이 캐릭터를 통해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었나.
▲실제로 일본사회가 동남아에서 간병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필리핀은 아직도 공동체 문화나 가족간 유대가 강한 나라다. 그래서 서로 힘든 일이 있으면 돕는 문화가 있다. 일본도 과거에는 이웃 간 유대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타인에게 무관심해졌다. 그래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커뮤니티와 일본사회를 대조하고 싶었다. 또 일본인은, 규율을 묵묵히 따르고, 정부의 결정에 이의제기를 잘 안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보다 사회나 타인을 의식하며 선택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마리아는 자기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플랜 75'의 대상자를 75세 이상 노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일본에서 75세 이상을 후기 고령자로 부른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그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불쾌했다. 마치 당신들의 삶이 이젠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후기 고령자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을 때 비인간적이라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이제는 정착됐다. 그래서 상상의 ‘플랜 75’ 제도가 생긴다면 그 기준이 75세가 되지 않을까. 처음에는 반대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마비되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도 나타내고 싶었다.
―주인공 미치를 가족이 없는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는? 그리고 미치는 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거절하나.
▲가족이 들어오면 휴먼 드라마가 될 수가 있다. 사회문제를 제기하는데 집중하고 싶어서 가족이 없는 노인으로 설정했다. 또 미치가 기초생활수급 대신에 플랜 75를 선택하는 것은, 일본에선 수급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토가 있다. 비난 여론마저 있다. 왜 내가 낸 세금을 게으른 사람에게 주느냐고 하기 때문에 그걸 신청하는데 있어 심리적인 장애가 높다. 그래서 극중 미치처럼 '조금 더 열심히 할게요' '힘내 볼게요'라고 한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데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 개봉 당시 반응이 어땠나.
▲일본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무섭다는 반응이 컸다. 2017년 ‘10년’ 속 단편으로 접했을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그랬다면, 코로나19를 거친 뒤인 2023년 장편이 개봉하자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 근미래 생겨날 제도'라는 반응이 컸다.
―프랑스 칸에서도 공개됐는데 어떤 차이가 있었나.
▲칸에서 한 기자가 “플랜 75 정책이 프랑스에서 실시되면 맹렬한 반대 반응이 일어날 것이라며, (극중 인물들이) 순수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흥미롭다”고 했다. 그건 정해진 것에 순종하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반영됐다고 본다. 그런 국민성에 문제의식을 갖자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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