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몽고군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다는 설은 설득력이 있다.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은 추위를 이기려고 가죽 술병을 차고 다니며 술을 수시로 마셨는데, 술 이름을 '아락주'라고 했다. 그 아락주가 바로 소주라는 것이다. 일본을 치려고 했던 몽고군은 개성과 안동을 전초기지로 삼았다. 두 고장에서 몽고군에 공급할 아락주를 만들었는데, 제조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성 지방에서는 근대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정을 희석해서 대량생산하는 희석식 소주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여왔다. 1919년 평양에는 '조선소주', 인천에는 '조일양조'가 세워졌다.
광복 후 소주 시장을 장악한 기업이 전남 목포에 뿌리를 둔 삼학소주다. 1929년 김상섭, 차남진, 김철진 등이 설립한 목포양주에서 출발한다. 1947년 무렵 김문옥, 김상두 등 목포지역 유지들이 경영에 참여했고 1950년 김상두가 인수해 공장을 옮겨 확장하면서 상표를 '삼학'으로 고쳤다고 한다. 삼학은 목포의 삼학도에서 따온 것이다. 목포양주 설립자 차남진은 극작가 차범석의 부친이고, 대주주로 참여한 김철진은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한 김우진의 형이라고 한다. 김문옥(1897~1966)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목포일보와 호남매일신문 사장, 대한유지생산업자회 회장, 제5대 민의원을 지낸 사업가 겸 언론인, 정치인이었다. 가수 남진의 부친이기도 하다.
삼학소주는 진로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소주업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경향신문 1965년 5월 10일자 광고·사진). 위조품이 나돌 정도였고 한때 국내 법인세 납부 20위를 기록한 대기업이었다. 삼학과 그 아성에 도전한 진로는 사원들을 술집으로 풀어 "삼학이 아니면 안 마시겠다" "진로를 달라"고 소리치며 전쟁 같은 영업경쟁을 벌였다. 그러다 1973년 삼학이 돌연 부도를 냈다. 납세필증을 위조해 탈세를 한 사실이 드러나 당시로서는 거액인 3억2000만원을 추징당한 여파였다.
이를 두고 뒷말이 많았다. 김상두 사장이 1971년 7대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괘씸죄'에 걸려 정치보복을 당했다는 말이다. 전북 진안 출신으로 목포로 와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김 사장은 동서인 김문옥으로부터 삼학을 인수해 크게 키웠다. 김 사장은 김문옥의 목포상업학교 후배인 김 후보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을 수 없었다.
당시 검찰이나 국세청은 물론 정치적 목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명백한 증거도 제시했다. 김 사장의 장남 김용환 변호사도 "DJ(김대중) 지원설은 시중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친 출혈경쟁과 경제불황, 김 사장의 건강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다섯마당 목포시사', 2017). 그래도 여전히 당시 정권이 국세청을 앞세워 세무조사를 했다는 말이 나돈다.
삼학이 바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탈세사건으로 김 사장은 검찰에 구속되었다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난 뒤 1975년 사망했다. 서울과 광주, 목포 3곳에 공장이 있었던 삼학은 부도 후 두 곳은 문을 닫았지만 광주 공장은 김 사장의 사위를 거쳐 부인이 1981년 5월까지 운영했다. 그러다 결국 재기불능 상태에 이르러 제조면허가 취소됐다. 전남 나주 삼영동에 있던 삼학의 주정공장은 진로가 인수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삼학을 살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표를 도용한 제품도 나타났다. 심지어 미국에서 제조된 삼학소주가 역수입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김모씨가 삼학양조라는 회사를 세우고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8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3년 후 김씨는 무죄판결을 받고 현재 그 회사를 운영 중이다. 인터넷에 삼학양조를 검색하면 공장의 위치도 나오고 인터뷰 기사도 나오지만, 판매실적이나 업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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