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차산 자락 광나루에 워커힐이 문을 연 것은 1963년이다. 명목은 관광산업 진흥과 경제발전 기여. 워커힐은 서구식 '하니비쇼'를 모델로 한 쇼를 기획해 그해 4월 8일 개관 기념으로 극장식 퍼시픽 나이트클럽 무대에 올렸다.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도 2주 동안이나 특별공연을 했다. 단원은 신인 가수를 뽑듯이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키 162㎝ 이상, 고졸 이상 학력의 내국인, 18∼21세의 나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합격한 뒤 연구생으로 6개월 동안 발레, 고전무용, 국악 등을 배워야 해 요즘의 아이돌 가수와 다를 바 없었다.
워커힐쇼는 국내 최초의 호텔 공연이자 공연 관광의 효시였다. 관객들은 반드시 정장을 입어야 했고, 처음에는 외국인을 위한 쇼였지만 정부 고위급 인사와 함께하면 내국인도 입장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청계천 고가도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워커힐에 쉽게 가고자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도 워커힐로 가는 길은 시내를 관통하는 청계천 고가가 가장 빨랐다.
워커힐 쇼단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수준의 공연을 선보였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66년에는 대만을 시작으로 동남아와 일본에서 공연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워커힐쇼는 발전과 변화를 거듭했다. 1978년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이 완공된 후에는 규모가 두 배나 커진 가야금 극장식당에서 진행됐다. 탈춤, 사물놀이, 부채춤 등 전통 공연과 대중가요, 코미디도 무대에 올려졌다. 워커힐쇼는 쉰 적이 없다. 단 하루 중단된 날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이었다. 2000년대 초에는 워커힐 민속무용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지막까지 공연 무대로 쓰인 워커힐시어터는 996㎡ 면적에 최대 1200명을 수용하는 대공연장이었다.
워커힐쇼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 무대에도 올랐다(조선일보 1968년 4월 12일자·사진). 수십년 전만 해도 워커힐은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들이 쉽게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광나루는 도심에서 두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교통이 불편했다. 용산기지의 미군들도 가기를 꺼렸다.
워커힐은 원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애초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이었던 워커힐의 건립 주체는 옛 중앙정보부였다.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이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군 위락시설이 없어 한 해 3만여명의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는 말을 들은 게 계기였다. 건설현장을 본 미국 기자는 "라스베이거스 외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워커힐이라는 이름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미 육군 월튼 워커 장군에서 땄다. 3개의 건물도 미군 장군의 이름이나 성을 넣어 각각 더글라스(맥아더)호텔, (리지웨이)머슈르호텔, 밴 플리트(제임스)호텔로 명명됐다. 그러나 예상만큼 방문객이 많지 않아 이익 내기가 쉽지 않았다. 정부는 1973년 선경(SK)그룹에 소유권을 넘겼다. SK 창업주 최종건은 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의 '5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막역한 관계였다고 한다. 존슨 미국 대통령과 가수 마이클 잭슨도 방한했을 때 워커힐에서 묵었다. 신성일과 엄앵란, 현빈과 손예진 등 연예인 부부도 워커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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