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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만년필 이야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2.29 18:17

수정 2024.02.29 18:17

[기업과 옛 신문광고] 만년필 이야기
시대 조류를 따라 사라진 것들이 많다. 손 편지가 그렇고, 그 손 편지를 쓰던 필기구가 그렇다. 필기구 중에서도 만년필은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을 거의 찾기 어렵다. 글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 한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에 톡톡 '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도 만년필로 공책에 필기를 하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만년필은 누구나 다 가질 수는 없는 귀한 필기구였다. 유독 기억에 남는 상표가 '英雄'(영웅)이다.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도 중국제 또는 홍콩제라고 했는데 50년 전 중국과 국교도 없던 시절에 중국제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왔는지 궁금할 뿐이다. 영웅은 미제 '파커' 만년필을 베낀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만년필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놀랍게도 영웅도 있다. 중국산이며, 디자인도 옛것과 거의 같다.

국산은 '빠이롯드'와 '아피스'(APIS), '마이크로' 등이 있었다. 만년필 삼총사 중 제일 먼저 태어난 것은 아피스다. 1956년 부산에서 설립된 국제아피스공업사가 이듬해 국내 최초로 내놓은 제품이다. APIS는 그리스어로 꿀벌을 뜻한다고 한다. 아피스 만년필 광고는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는 카피를 썼다. 필체를 중하게 여기는 옛사람들의 생각이 그랬다.

외환위기 때 구제금융 문서에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서명을 하면서 비싼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해 비난을 받았다. 구제금융을 졸업할 때는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아피스 RB939로 서명했다. 그러나 컴퓨터에 밀린 아피스는 2010년대 초반에 생산을 멈추었고, 홈페이지도 닫았다. 국세청 폐업신고일은 2020년 6월 25일로 나온다. 부산 서구 천마로에 있는 작은 공장 건물만 유적처럼 남아 있다.

마이크로는 덜 알려졌지만 품질은 좋았다. 아피스와 비슷한 시기 서울 미아동에서 조청길·조순길 형제가 세운 '신흥정밀'이라는 필기구 업체에서 출발한다. 만년필은 1990년대 들어 만들었다. 이 업체는 '꽃샤프'와 '세라믹펜'으로 세계 시장으로 진출, 1996년 매출 1300억원에 직원 수가 2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형 문구업체로 성장했지만 1997년 부도를 내고 사라졌다.

가장 유명했던 만년필은 빠이롯드다. 1954년 황해도 개성 출신의 실향민인 창업주 고홍명 회장이 신화사라는 문구업체를 설립한 데서 시작했다. 1961년 일본 파이롯트와 기술제휴를 맺었고, 이듬해 서울 천호동에 만년필 공장을 완공했다. 빠이롯드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가서 어깨너머로 보고 기술을 배워 오거나 사진만 들고 와서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빠이롯드는 1964년 만년필을 100% 국산화했다. 국내 최초였다. 1972년 '연필의 혁신' 샤프펜슬 개발에 성공한 기업도 빠이롯드이며, 역시 국내 최초다(조선일보 1972년 2월 5일자 광고·사진).

입학과 졸업 선물로 빠이롯드 만년필은 최고 인기였다. 빠이롯드는 니들펜 등 다양한 필기구를 생산하며 1980년대 후반 전성기를 누렸다. 여자 농구단을 운영하고 김창숙, 황신혜, 채시라 등 당대 최고의 배우를 모델로 기용할 만큼 자금사정도 넉넉했다. 천호동 공장도 경기도 성남으로 확장, 이전했다. 일회용 라이터 시장에도 뛰어들며 사업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개인컴퓨터의 등장으로 필기구 사용이 점차 줄어들고, 설상가상 중국산이 넘쳐나며 불황에 빠졌다.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극복하지 못했다. 서울 종로 보신각 바로 옆 건물에 매장이 있었고, 밤이 되면 옥상의 노란 네온사인이 시선을 끌었지만 2018년 5월 폐점하면서 사라졌다. 빠이롯드는 2020년 성남 1·2공장 운영을 접고 기계설비를 성남시에 기증했다. 빠이롯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듬해 일본 파이롯트와 유통계약을 체결,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름도 맞춤법을 좇아 '한국 파이롯트'로 바꿨다.
현재 본사는 서울 돈화문로에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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