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이와이 슌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한국 관객들이 사랑하는 일본 감독들이 많다. 이 감독들과 동년배인 사카모토 준지(65) 감독은 상대적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낯설지만, 일본 내에서는 '일본 뉴웨이브 대표 거장'이라 불리며 앞서 언급한 감독들 못지않게 유명하다. 영화 '팔꿈치로 치기'(1989)로 요코하마영화제 신인감독상 등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복서 조'(1995) '멍텅구리 - 상처입은 천사'(1998) '얼굴'(2000) 등의 대표작들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2002년에는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 사건을 다룬 영화 'KT'로 우리나라에서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신작 '오키쿠와 세계'는 일본에서 영화 '괴물'을 제치고 제97회 키네마준보 일본영화 베스트10 1위를 차지한 작품이다. '괴물'은 같은 목록에서 7위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키네마 준보는 1919년 창간돼 일본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 받는 영화 전문 잡지로 매해 영화 베스트10을 선정해 발표한다. 키네마준보의 베스트10은 일본 아카데미상, 블루리본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등과 더불어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상이다.
지난달 21일 개봉한 '오키쿠와 세계'는 19세기 에도 시대,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쿠로키 하루 분)와 인분을 사고파는 분뇨업자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 분)와 츄지(칸이치로 분), 세 남녀의 사랑과 청춘을 담은 극 영화다. 총 7개의 짧은 장으로 이뤄진 이 영화의 키워드는 '순환'이다. 분노업자들이 냄새를 참으며 열심히 퍼나른 인분은 들로 밭으로 돌아가 음식이 되고, 그 음식은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 다시 인분이 돼 나온다. 돌고 도는 삶이지만, 그 속에는 매번 다른 고통이 있다. 에도 시대의 문화 속에서 천대 받는 청춘들은 각자의 상실과 시련을 겪게 되지만, 순수한 사랑으로 이것을 견뎌내며 더 넓은 '세계'를 살아낸다.
지난 2월 말,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이 작품의 프로듀서이자 미술감독인 하라다 미츠오와 함께 내한했다. 하라다 미츠오는 '얼굴'(2000) '와글 와글 시모키타자와'(2000)로 마이니치 영화 콩코르 미술상, '북쪽의 카나리아들'(2012)로 일본 아카데미상 미술상, '행복한 사전'(2013) '일일시호일'(2018)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미술상을 수상한 실력자다.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인 봉준호 감독과 GV를 하는가 하면, 배우 유지태와 만나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과 만났다.
<【인터뷰】①에 이어>
-영화를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4년 전에 하라다 미츠오씨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순환형 사회를 주제로 한 장편영화를 찍어주십사 하는 제안이었다. 자금 조달이 안 된 상태였다, 하라다 미츠오씨가 사비를 털어서 단편을 만들어보자는 데서 시작했다, 15분짜리 단편을 파일럿으로 삼아 장편으로 만들 자금을 모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3년 전에 또다시 15분짜리 단편을 만들었고, 단편 두 편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자금 모으려다 안 돼서 장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2년 전에 영화계와 관련 없는 단체에서 투자받게 됐고 나머지 60분을 찍게 됐다. 그렇게 3년간 영화를 조금씩 찍으면서 영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찍게 됐다. 제작 기간은 3년이라고 말씀드리지만, 실제 촬영 일수는 12일간이다. 단편집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도 처음 하는 경험이었고 단편 1화로 완결된 것을 하나의 장편 영화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신선했다. 이 같은 제작 방식의 장점이 있다면 영화 속에 계절을 담을 수 있었다, 계절을 담을 수 있어 이 영화가 풍성해졌다.
-12일 만에 찍은 작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노하우가 있다면.
▶메인 스태프들의 당시 평균 연령이 62세 정도 될 것이다. 녹음 기사가 70세였다. 베테랑들이 모이면 나뿐 아니라 망설임이 없다. 이런 걸 자랑하면 그렇지만 이번 영화가 30편째 되는 영화다, 그동안 나름의 기술과 노하우들을 쌓아온 것 같다. 단기간에서 영화가 풍요롭게 보이게 찍는 것, 그동안에도 이런 촬영 방식으로 해와서 경험치 덕분에 고민하지 않는다. 낭비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찍는 거여서 가능했다.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흑백으로 찍은 이유가 무엇인가. 분뇨의 비중이 커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분뇨에 대한 직접 묘사가 나와서 흑백 영화로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모두 생각하기 쉬우실 것 같은데 순서는 반대였다. 이전부터 나는 흑백 영화를 찍고 싶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영화사들은 흑백으로 찍다 보면 그것을 저예산처럼 느껴진다거나 영화가 가난해서 그렇다고 느끼는 건지, 기획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투자가 되지 않는 경우가 그동안 있었다. 하라다 미츠오 미술 감독의 기획에서 시작해 독립영화처럼 제작이 됐기 때문에 투자사의 간섭 없이 서로 의기투합해 흑백 영화를 찍어보자고 했다.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품팀이 분뇨를 제작하고 있어서 어떤 완성도로 만들어지는지 보러 가자고 했는데, 그것을 봤을 때 높은 완성도에 흑백으로 하기를 잘했구나 역으로 생각하기는 했다.
-전작 '얼굴'에서도 그랬지만 여주인공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여성 캐릭터와 일본 사회가 만나는 부분을 남다르게 그리는 것 같다.
▶그동안 남자 주인공이 많았는데 '얼굴'에서 처음으로 후지야마 나오미와 함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는데 남성 주인공은 같은 남성이다 보니 조금 더 내가 바라는 남성상, 나 자신이 직접 투영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여성이 주인공이 됐을 때 훨씬 더 내 생각, 자신을 투영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여성일 경우에는 그 사람을 남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사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남자라면 남자는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는 생각이 투영된다면 여성일 때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 주인공 영화 만들 때보다 자신을 깊게 투영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항상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 주의하는 것이 있다. 예전에 저명한 소설가 키리노 나츠오에게 들은 말이다. '사카모토 감독님, 여성을 그릴 때 남성의 욕망,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을 표현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말이었다. 나는 항상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시나리오 쓸 때 항상 멈춰서서 '이건 남자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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