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1720년 음력 6월, 경종이 임금으로 즉위했다. 경종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병약하고 걱정과 두려움이 많아 우울감도 심했다. 왕에 오를 당시까지도 적대 관계에 있는 노론과 경종을 옹호하는 소론의 당쟁이 극에 달해 화가 심했다.
경종은 즉위 이후에 결국 화기(火氣)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정신이 혼미한 증상까지도 나타났다. 내의원에서는 계속해서 우황육일산(牛黃六一散)과 곤담환(滾痰丸) 등 아래로 하리(下利)시키는 처방을 복용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경종 즉위 2년(1722년), 급기야 이공윤이 천거되어 약방에 들어가 왕의 병환을 살피게 되었다. 이공윤은 평소 강한 약으로 하기시켜서 치료하는 처방을 선호했다. 그는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과 시평탕(柴平湯)에 대황, 지실 등을 넣어 처방했다. 심지어 시평탕 가감방은 계묘년(1723년) 말부터 다음 해 봄까지 처방되어서 거의 백 십여첩을 올렸다. 이공윤은 성질이 광폭하기까지 해서 누구도 처방에 토를 달지 못했다.
1724년 음력 7월, 여름이 되면서 경종은 식욕이 떨어져서 수라상마저 거부했다. 의관들은 날마다 입진해서 환후를 살폈다.
음력 8월 2일, 경종은 오한발열(惡寒發熱)의 징후가 나타났다. 내의원 약방에서는 급히 시진탕(柴陳湯)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경종의 한열증은 조금씩 악화되었다. 특히 밤이 되면 심해졌다.
경종의 체격은 외형(外形)은 왕성하나 비위(脾胃)가 약한 체질이어서 이공윤의 처방을 견디질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수라를 들지 못한 날 수가 길어지면서 마침내 한열의 증세가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도제조 이광좌는 오히려 대비마마의 병환이 나은 것도 이공윤 때문이라며 치켜세우면서 논상(論賞)을 청하기도 했다.
약방에서는 다시 승양산화탕(升陽散火湯), 시호백호탕(柴胡白虎湯) 등을 지어 올렸다. 의관들은 학질(瘧疾)로 진단했다. 그러나 한열증은 잡히지 않고 간혹 설사까지 했다.
이렇게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음력 8월 19일, 약방에서는 경종이 피로함을 호소하기에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올렸다. 육군자탕은 기가 허하고 담(痰)이 성하여 온몸이 노곤하면서 식욕이 없고 때로 메스껍고 토하며 설사를 하는데 쓰는 처방이다. 지금까지 실증(實症) 처방을 했다면 이제 허증(虛症) 처방으로 바뀐 것이다.
다음 날인 음력 8월 20일 밤에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졌다. 대비전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대비전에서는 “주상의 복통은 벌써 며칠째 수라를 들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요즘 가을 게장이 나오니 수라간에서 게장과 감을 올리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당시 게장은 가을철 별미였다. 경종은 짭조름한 맛의 게장을 꽤 많이 먹고 나서 이어서 후식으로 감까지 먹었다. 그 소식을 들은 대비전에서는 기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새벽, 게장과 감을 먹은 경종은 심한 복통과 설사를 했다. 복통은 잠시 멈추는가 싶다가도 장이 끊어지듯이 아프면 여지없이 수설(水泄)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얼마나 심하게 설사를 하던지 항문이 빠져나오는 듯 고통스러웠다.
음력 8월 21일 아침, 약방에서는 경종의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전날 밤에 대비전으로부터 게장과 함께 감이 진어된 것 때문인 것을 알고 무척 놀랐다.
약방의 한 의관이 “의서에 보면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고 설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기운이 차갑기 때문입니다. 복통과 설사가 있는데, 설상가상 여기에 게와 감이라니요?”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게와 감을 올렸는지, 상한 게는 아니었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약방에서는 급히 두시탕(豆豉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모두 곽란(癨亂)을 치료하는 처방들이다.
식중독을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까지도 복통과 설사는 잡히지 않고 심해졌다. 약방에서는 다시 황금탕(黃芩湯)을 지어 올렸다. 황금탕은 급성장염에 쓰는 처방이다.
음력 8월 23일, 경종은 설사가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혼미하고 기운이 없었다. 약방에서는 복용 중인 황금탕을 중지하고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을 올렸다. 인삼속미음은 메좁쌀에 인삼 달인 물을 넣어 끓인 죽으로 병약자의 소화를 돕고 기운을 나게 하는 음식이다.
그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경종의 환후는 위태롭고 맥은 무력했다. 그날 밤 새벽 2시경에도 약방에서 입진해서 다시 인삼차를 올린 후 수라를 관장하는 주원(廚院)에서 숙직을 했다. 주원에서 숙직을 한 이유는 함부로 수라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감시 목적이었다.
음력 8월 24일, 날이 밝자 오전 10시경 의관들이 다시 서둘러 입진했다. 도제조 이광좌와 제조 이조가 인삼속미음을 진어하기를 청했지만 경종은 대답이 없었다.
이에 연잉군이 재차 “전하, 미음을 좀 드시옵소서.”라고 했다.
그러자 경종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인삼속미음 한 숟가락을 간신히 먹었다. 연잉군은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영조왕이 된다.
제조 등이 물러 나와 여러 의관들과 앞으로 어떤 처방을 쓸지 논의를 했다.
이때 이공윤이 “주상의 증상에 인삼을 쓰면 안됩니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계지마황탕은 원래 상한(傷寒)에 쓰는 처방이지만 그치지 않는 손설(飱泄, 음식이 소화되지 않고 나오는 설사)에도 사용되기도 한다. 약방에서는 이공윤이 하도 자신있게 말하기에 인삼차와 인삼속미음을 중지하고 계지마황탕을 달여 올렸다.
저녁 6시경에 의관이 입진을 하고서는 “성상의 환후가 아침에 비교해 더욱 위급합니다.”라고 알렸다.
모든 신하들이 서둘러 희인문으로 모여들었다. 도제조와 제조 모두 입진을 해서 보니 경종은 내시에게 몸을 기대어 힘들게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힘겨워 보였다.
도제조 이광좌가 “환후는 어떠하시옵니까?”하고 문후를 올렸지만 경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스르르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연잉군이 울부짖으면서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하고 소리쳤다. 이광좌는 인삼만을 달여서 급히 올렸고 경종은 천천히 몇 모금 삼켰다.
바로 그때 갑자기 이공윤이 들어 오더니 이광좌에게 귀엣말로 “내가 앞서 인삼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처방한 계지마황탕을 어서 진어하도록 하시오. 또다시 인삼차를 올리게 되면 기(氣)가 돌지 못하고 막히게 될 것이오.”라고 화를 내듯이 말했다.
귓가에 대고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커서 주위의 모든 신하들에게 들렸다.
그러자 연잉군이 어이가 없어 하면서 이공윤에게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을 세울 때와 장소가 있기는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인삼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요?”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잠시 후 경종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면서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인삼차 때문이었을까?
연잉군은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나는 의약의 이치를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능히 회복시키는 것만은 알고 있소이다.”라고 하였다.
이공윤은 왕손인 연잉군의 말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뒤로 하고 물러났다. 밤 10시경에 임금의 기운과 숨소리가 다시 미약해졌다. 이광좌가 인삼차를 올렸으나 경종은 스스로 마시지 못해 의관이 숟가락으로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러나 삼키지를 못하고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의관이 경종의 코에 새의 깃털을 대어 보니 실오라기 같은 떨림이 남아 있었다. 맥은 곧 끊어질 듯한 가는 실처럼 느껴졌다. 풍전등화와 같았다.
밤이 깊었다. 새벽 2시경, 경종은 즉위한 지 4년 만에 환취정에서 승하했다. 내시가 지붕에 올라가 경종의 속적삼을 잡고 흔들면서 ‘복복복(復復復)’하고 세 번 외치면서 혼을 달래며 임금의 훙서(薨逝)를 온 천하에 알렸다. 저 멀리 밤하늘에 유성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비전에서 게장과 감을 함께 올려서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퍼졌다. 그러나 이는 소론에 의한 이간계였다. 또한 연잉군에 의한 인삼 독살설 또한 퍼졌으나 신빙성이 높지 않다. 연잉군은 인삼을 최고의 약재로 여겼을 뿐이다. 연잉군은 훗날 영조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엄청난 양의 인삼을 복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종은 학질을 치료하다가 위장에 탈이 난 상태에서 ‘상한’ 게장을 먹고서 식중독에 걸려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경종이 연잉군의 인삼의 복용을 중지하고 이공윤의 계지마황탕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 제목의 ○○○은 ‘식중독’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 ○ 景宗 4年 甲辰 7月 20日 辛酉. 上有疾不豫, 藥房連日問安. (경종 4년 갑진 1724년 음력 7월 20일. 임금이 병환이 있어 편치 않으므로 약방에서 날마다 문안하였다.)
○ 景宗 4年 甲辰 1724年 8月 2日. 上疾連日彌留, 厭進水剌, 至是, 又有寒熱候, 藥房入診議藥, 進柴陳湯. 上自在東宮, 積憂畏, 遂成難狀之疾, 歷歲沈痼, 火熱上升, 有時昏迷. 連服局方所進牛黃六一散, 滾痰丸等下利之劑, 猶未效. 士人李公胤, 性狂妄, 業醫有名, 而其術大抵以峻利爲主. 壬寅後, 薦入藥房侍疾, 公胤自言, 以桃仁升氣湯數服, 大蕩滌之, 上疾可立愈, 試之無驗. 公胤猶恣睢自衒, 更議柴平湯, 以大黃, 枳實推盪之材爲君藥, 自癸卯以後, 至今春連進百數十貼. 上雖體膚外旺, 而脾胃內虛, 厭膳日久, 遂發寒熱之症. 李光佐不能覺公胤之妄, 反以大妃疾愈, 歸議藥功於公胤, 至請論賞, 識者惜之.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일. 임금의 병환이 계속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를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또 한열의 징후가 있어 약방에서 입진하고 약을 의논하여 시진탕을 지어 올렸다.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국방에서 올린 우황 육일산과 곤담환 등 하리의 약제를 복용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사인 이공윤은 성질이 광망하였으나 의업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를 위주로 하였다. 임인년 이후로 천거되어 약방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시었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을 자주 복용하여 크게 탕척해 내면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을 시험해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보면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다시 시평탕을 의논하면서 대황, 지실 등 추탕하는 재료로 군약을 삼아 계묘년에 시작하여 올봄에 이르도록 계속하여 1백 수십 첩을 올렸다. 그러자 비록 임금의 체부의 외형은 왕성하나 비위 등 내장이 허하였고, 음식을 싫어하는 날수가 오래 되어 마침내 한열의 증세가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이광좌는 이공윤의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대비의 병이 나은 것도 그 의약의 공을 이공윤에게 돌리고 논상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3日. 夜, 上寒熱猝劇, 藥房都提調李光佐等入診於大造殿寢室, 翌朝議進升陽散火湯. (경종 4년 갑진 1724년 음력 8월 3일. 밤에 임금이 한열이 갑자기 심하여 약방 도제조 이광좌 등이 대조전 침실에 입진하고, 이튿날 아침에 의논하여 승양산화탕을 지어 올렸다.)
○ 景宗 4年 1724년 8月 8日. 上疾, 寒熱不止, 藥房議進柴胡白虎湯, 三提調始直宿本院.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8일. 임금이 한열이 그치지 않아 약방에서 의논하고 시호백호탕을 지어 올리고, 세 제조가 처음으로 본원에서 직숙하였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16日. 上疾, 寢膳日減, 小便漸短, 藥房議藥, 進柴苓湯.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16일. 임금이 병환으로 침선이 날로 줄어들고 소변이 점점 단축되므로 약방에서 약의 조제를 의논하고 시령탕을 올렸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19日. 藥房入診, 更議藥, 進六君子湯. 始慮上候虛憊也.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19일. 약방에서 입진하여 다시 약의 처방을 의논하고 육군자탕을 올렸으니, 비로소 임금의 환후가 허하고 피곤함을 염려하였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0日. 夜, 上胸腹絞痛, 招醫官入診. 藥房提調, 詣閤門外問安.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0일. 밤에 임금이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하도록 하고, 약방 제조가 합문 밖에 나아가 문안을 하였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1日. 藥房入診. 諸醫以上昨日進蟹醬, 繼進生柿. 是醫家所忌, 請進豆豉湯及藿香正氣散.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1일. 약방에서 입진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 및 곽향정기산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2日. 上腹痛泄瀉益甚, 藥房入診, 進黃芩湯.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2일. 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하여 약방에서 입진하고 황금탕을 지어 올렸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3日. 上泄候不止, 昏困特甚, 藥房入診, 停湯藥, 連進人參粟米飮.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3일. 임금의 설사의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여 탕약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을 올렸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4日. 雨雪. 上候困殆益甚, 脈低無力. 四更, 藥房入診, 進參茶, 退而請移直廚院, 巳刻復入診. 上自有疾以來, 諸臣問聖候, 上輒有酬答, 至是, 玉聲漸微. 都提調李光佐、提調李肇, 勸進粥飮, 皆不答, 世弟起而請之, 上始擧首進米飮. 提調等退與諸醫議藥, 李公胤揚言: “參茶不可用. 若進桂枝麻黃湯二貼, 泄瀉可立止.” 遂煎入進服. 酉刻醫官入診, 退言: “症候比朝益危急.” 諸臣疾趨入熙仁門, 自內促提調入診, 李光佐等入侍, 上倚內侍, 眼深視瞋. 光佐問候, 上不答, 世弟泣曰: “急用參附.” 光佐進參茶, 上再進服. 李公胤謂光佐曰: “毋多用參茶. 進吾藥而復進參茶, 則氣不能運旋也.” 世弟曰: “人固有立己見處, 此何等時, 必欲立己見, 使不得用參劑耶?” 少頃, 上眼視稍定, 鼻梁復溫. 世弟曰: “予不解醫理, 尙知參附能回陽矣. 昨日用參旋停, 想必以公胤言持難也.” 二更, 上氣息復微, 光佐進參茶, 上己不能飮, 醫官以匙灌之. 光佐請祈禱廟社, 仍涕泣言: “臣愚迷昧症候, 藥物多失宜, 罪當萬死.” 世弟曰: “聖上於余, 情是兄弟, 義兼父子, 侍疾無狀, 遽至於此, 更何言哉? 祈禱雖過時, 宜速擧行.”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4일. 비와 눈이 내렸다. 임금의 환후가 피곤하고 위태함이 더욱 심하고 맥이 낮아져서 힘이 없었다. 4경에 약방에서 입진하여 삼다를 올리고 물러 나와서는 주원으로 옮겨서 입직하기를 청하였으며, 사각에 다시 입진하였다. 임금이 병환이 있은 뒤로 여러 신하들이 성후를 문안하면 임금이 번번이 응수하여 대답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음성이 점점 미약하여졌다. 도제조 이광좌와 제조 이조가 미음을 진어하기를 권하였으나 모두 응답하지 않았으며, 세제가 일어나서 청하매 임금이 비로소 고개를 들므로 미음을 올렸다. 제조 등이 물러나와 여러 의원들과 약을 의논하였는데, 이공윤이 공언하기를, “삼다를 써서는 안된다. 계지마황탕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하므로, 마침내 다려 올려 복용하였다. 유각에 의관이 입진하고 물러나와 말하기를, “환후의 증세가 아침에 비교해 더욱 위급합니다.”하자, 모든 신하들이 희인문으로 달려 들어갔고, 대내로부터 제조의 입진을 재촉하여 이광좌 등이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내시를 의지하고 앉아서 눈을 몹시 부릅뜨고 보았다. 이광좌가 문후를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자, 세제가 울면서 말하기를,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하였고, 이광좌가 삼다를 올려 임금이 두 번 복용하였다. 이공윤이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삼다를 많이 쓰지 말라.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하니, 세제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하였다. 조금 지나자 임금의 안시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여졌다. 세제가 또 말하기를, “내가 의약의 이치를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능히 회복시키는 것만은 안다.”하였다. 어제 쓰던 삼을 바로 멈추었던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이공윤의 말 때문에 미루었던 것 같다. 2경에 임금의 기식이 다시 미약하므로 이광좌가 삼다를 올렸으나 임금이 스스로 마시지 못하여 의관이 숟가락으로 떠서 넣었다. 이광좌가 종묘와 사직에 기도하기를 청하고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여 증후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도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하였고, 세제는 말하기를, “성상이 나에게 정으로는 형제이나 의로는 부자의 관계를 겸하였는데, 병환 중에 모시기를 잘하지 못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빨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 景宗 4年 1724年 8月 25日. 夜, 流星出昴星下, 又出井星上. 丑刻, 上昇遐于環翠亭, 內侍乘屋復, 乃擧哀. (경종 4년 1724년 음력 8월 25일. 밤에 유성이 묘성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에 임금이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내시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을 하고 곧 거애를 하였다.)
○ 英祖 31年 5月 21日. 甲辰八月, 景廟違豫彌留, 水剌厭進之候漸加, 故宮中憂遑, 二十日御廚於水剌, 供蟹醬. 乃秋節新味, 故景廟以此多進水剌, 宮中皆歡喜. (영조 31년 1755년 음력 5월 21일. 갑진년 1724년 8월에 경묘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를 들기 싫어하는 징후가 점차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었다. 이는 가을철 새로운 맛인데,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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