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인생에 단맛만 있으면 당뇨죠.(웃음)"
배우 김규리(44)가 배우로서 살아오며 겪은 지난날의 여러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는 17일 영화 '1980'(감독 강승용)의 개봉을 앞둔 김규리는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라운드 인터뷰에 임했다. '1980'은 1980년 5월 17일 중국집을 오픈한 철수네와 미장원을 운영하는 영희네가 5 ·18 민주화 항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극 중 김규리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잃지 않는 맏며느리이자 집안의 활력소 철수 엄마를 연기했다.
"영화가 개봉할 줄 몰랐어요. 잊고 살았거든요. 하도 소식이 없어서 이쯤이면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했었고요. 그냥 저는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4월 12일에 한벽원미술관에서 한국화 3세대 선생님들과 단체전을 하는데, 두 작품을 올렸어요. 그리고 5월 9일에는 새롭게 나온 작품들을 서울아트페어에 올려요. 계속 그림을 그리다가 소식 듣고서 '안 되는데' 했어요. 그림 그려야 하니까, 그림 그리려면 어떡하지 하다가 이를 깨물고 그래 개봉해야지, 양쪽으로 뛰다가 감기까지 걸려버렸네요."
'1980'은 특별한 시기에 찾아온 영화다. TBS 라디오 '퐁당퐁당'의 DJ로 활동하던 시기, 갑작스러운 프로그램 폐지 통보로 충격을 받은 뒤 이 영화의 출연을 확정하게 됐다.
"목포에 내려가서 촬영하는 게 부담이어서 대본을 읽지 않고 있다가 '퐁당퐁당'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허탈해서 펑펑 울었어요. 집에 들어와서 가만히 머리를 차갑게 하고 생각해 보니까, '그래 길은 계속 날 거야' 생각이 났고 '1980'의 대본을 읽어봤는데 좋았어요. 재미가 있었죠."
'1980'은 저예산 영화다. 적은 예산으로 짧은 기간에 영화를 완성했다. 홍보 마케팅 비용이 부족해서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하기도 했던 영화는 목표 모금액의 8배가 넘는 2억 5000만 원을 모아 준 관객들의 성원이 있어 개봉을 결정하게 됐다.
"이 영화가 개봉하는 건 기적이에요. 눈물 났어요. 제 생각인데 '1980'이 개봉할 수 있었던 건 '서울의 봄' 덕분에 개봉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본력도 그렇게 많지 않고 (영화가)돈과 힘으로 움직여지는 건데,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었고 호응을 끌어내는 건 그다음 이야기잖아요. 12·12사태를 막지 못해 벌어진 게 5.18인데, 그래서 많은 분들이 관심 있어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영화에서 김규리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그 시절 젊은 아낙을 연기했다.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듯도 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이를 훌륭히 소화해 냈다.
"목포에서 촬영했는데 목포 구도심에 들어가면 거기가 되게 매력적이에요. 옛날의 적산 가옥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그 공간 안에 들어가는 순간 세트장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사투리는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사투리를 쓰시는 분께 직접 레슨도 한 두 차례 받았지만, 대부분은 목포 촬영하면서 동네 분들과 수다를 떨면서 배웠어요. 평상에 많이들 앉아계셨는데 주민분들이 저에게 '목포 사람이여?' 하기도 하셨어요.(웃음)"
역사 속 사건을 다룬 만큼, 시사회 후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김규리는 "5.18 이야기라서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얘기를 하시는데, 그것보다도 우리한테 있었던 일이고 우리의 아픈 역사이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라고 말했다.
"시사회 할 때 기자간담회 전에 테이블을 놓고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요. 그동안 배우들은 밖에 있는데 한 시민이 오셨어요. 조용히 오셔서 감독님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제게 오시더니 한마디 하셨어요. 머뭇머뭇하시면서 '제가요' 하시고는 얘기하길 '전남도청에서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한 말씀 해주셨죠. 저는 이 영화를 찍어서 (당시의) 분위기가 대충 어땠을 것을 알고 있어요. 영화 촬영하면서 영상들도 보고, 간접적인 경험을 하게 됐거든요. 거기서 살아 돌아오신 분이라고 한 말씀만 하시고 가만히 서 계시는데 뭔가 말씀드리고 싶은데 딱히 어떤 말을 해야 상처 드리지 않고 힘을 드릴 수 있을까 싶었어요. 응원해 드리고 싶었고요. 입에서 단어가 안 나오더라고요..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있다가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했어요."
어떤 '프레임'들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을 비웠다.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때 선한 캐릭터든, 나쁜 캐릭터든 선택해요. 작품에 출연하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요. 프레임 안에 넣고 재단하면 그 사람이 되게 쉽게 설명할 수 있고 '쟤는 저런 애야'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우리네 인생이 그렇잖아요. '너는 이런 애야' 한다고 제가 그런 애로 규정되는 게 아니까요. 우리는 복잡한 삶을 선택하고 걸어가고 있어요. 내 인생이 어떤지 몰라서 나를 쉽게 보고 싶은 사람들이 저렇게 부른다고 생각해요."
영화 '미인도'(2008)에서 신윤복 역할을 했던 것을 계기로 동양화에 입문한 김규리는 벌써 15년 넘게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첫 개인전을 열었던 2021년이다. 이제는 배우일 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길을 가고 있는 그는 작가로서 우리 전통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이 꿈이다.
"그림으로는 전통을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이건 지금 당장 못해요. 제게 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요. 작가로 활동하는 건 힘을 기르는 거예요. 우리나라 전통 장인들을 외국에 모시고 가는 게 제 목표에요. 수묵과 민화를 해왔고 작년부터는 단청도 연구하고 있어요. 나중에 단청장(단청을 그리는 국가무형문화재)이 돼서 할머니 때는 단청 그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내년에는 단청장 시험을 보려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영화 개봉 때문에 공부를 멈췄어요. 시험은 한 해 더 미루게 될 것 같아요."
배우로서는 앞으로 액션에 도전해 보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유명 액션 배우인 마동석의 복싱 체육관에 회원으로 등록해 복싱을 배워보려고 준비 중이다.
"(마동석이) 저 녀석 근성 있게 하네 하면서 불러주지 않을까요?(웃음) 사심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거기(복싱클럽) 가면 제 그림도 있어요. 오빠한테 선물 드렸어요., 호랑이 중에 제일 큰 에디션을 드렸는데 오빠가 (복싱클럽)들어가는 입구에 놓겠다고 했거든요."
김규리는 인생에서 겪은 모든 일들에 다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저 자신만 생각할 때는 맨날 단맛만 있으면 좋겠는데 단맛만 있으면 당뇨에 걸리잖아요. 인생이 건강해지려면 이런 일 저런 일, 모진 풍파도 겪으면서 상처도 받으면서 굳은살이 단단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죠.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럴 것이라서, 저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고 애잔해요. 왜냐하면 한 분 한 분 다 그런 삶을 헤쳐 나가고 앞으로 나아가실 것이기 때문에요.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나를 응원하듯 사람들을 응원해야겠구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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