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NPT 탈퇴發 첫 북핵위기
한미 정부, 北고위급 만나 설득
공동성명·경수로 지원 등 요구
미북 평화협정 무리한 요구에다
"핵무기 없다" 김일성 거짓말도
이듬해 1994년 제네바 합의
하지만 2003년 결국 NPT 탈퇴
한미 정부, 北고위급 만나 설득
공동성명·경수로 지원 등 요구
미북 평화협정 무리한 요구에다
"핵무기 없다" 김일성 거짓말도
이듬해 1994년 제네바 합의
하지만 2003년 결국 NPT 탈퇴
[파이낸셜뉴스] 1993년 비밀해제 외교문서가 29일 공개됐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북핵 위기가 처음 떠올랐던 해다. 당시 김영삼 정부와 미국 정부의 설득에 북한은 요구를 늘리거나 거짓말을 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 2개소에 대한 특별사찰 압박과 한미 팀스피릿 훈련을 빌미로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애초 북한 고위급 접촉을 통한 설득은 고려하지 않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를 가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과 대화 없이 제재만 가해선 자신들이 설득에 나설 명분이 없다고 반박하면서 미북 고위급 회담이 시작됐다.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양측 대표로 나선 1차 미북 고위급 회담은 미 뉴욕에서 6월 2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다. 북측은 미국의 지원·내정불간섭·자위 제외 무력불행사·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지지 등 4개항이 포함된 미북 공동성명 채택을 전제로 NPT 탈퇴를 보류하겠다고 통보했고, 미측이 수용했다.
공동성명 채택에도 북한은 NPT 탈퇴 ‘철회’가 아닌 보류임을 강조하며 북핵 위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제네바에서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이어진 2차 미북 고위급 접촉에서 북측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며 원자로와 핵무기 관련시설 전체 폐기 용의를 전했다.
갈루치 차관보는 한승주 외무장관에게 이를 전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는데,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지연전술’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2차 회담에도 IAEA 사찰을 비롯해 북핵 문제는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10월 개리 애커먼 미 하원 외무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방북 전에 북측은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를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케네스 퀴노네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에서 ‘일괄타결 방안’을 전달해 교란하기도 했다. NPT에 잔류하는 대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과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남북 균형정책 약속 등을 맞바꾸자는 제안이다. 이를 들은 김영삼 정부는 북측 요구의 위험성을 상세히 지적했다.
북측은 평양을 찾은 애커먼 소위원장을 상대로도 거짓말을 했다. 애커먼 소위원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김일성이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제조능력도 없으며,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나 동기도 없으며, 돈도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 것이다. 이에 김 대통령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위성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한미 정부의 북한 설득의 결실로 이듬해인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은 NPT 탈퇴 결정 유보를 선언한다. 핵프로그램 동결과 경수로 지원을 명시한 합의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 합의를 위반했다고 비판하자 북한은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uknow@fnnews.com 김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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