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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정치 블랙홀의 팽창과 지성의 위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4.01 18:20

수정 2024.04.01 18:20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현실 정치의 모습은 시민의 눈에 잘 보인다. 관련 이야기가 언론 매체와 개인 SNS에 범람한다. 특히 선거철에 그렇다. 반면 지성의 정신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언론이나 일상 대화에 별로 안 나온다.
그래도 지성의 정신이 살아 현실 정치를 견제·순화해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국가체제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지성의 정신이 위축·실종되면 현실 정치의 논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며 큰 병폐를 낳는다.

석학 로버트 K 머튼은 약 80년 전 사회과학을 논하며 지성의 정신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보편성(universalism)으로서 지성은 지엽적 경계를 넘어 폭넓게 많은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생각, 전체를 지향하는 생각을 추구하게 한다. 둘째, 공동체성(communality)으로서 지성은 여러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며 공동의 소통을 통해 생각을 모으게 한다. 셋째, 불편부당성(不偏不黨性·disinterestedness)으로서 지성은 편견과 편향에 휘둘리지 않고 사적 가치에 초연함을 유지하게 한다. 넷째,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로서 지성은 맹신·맹종을 거부하고 사안의 명암을 냉철하게 따져보게 한다.

공감 가는 분석이다. 이 지성의 정신이 어느 정도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현실 정치의 모습은 요즘과 같을 수 없다. 오늘날 정치를 보면 보편성보다 지엽성·편협성이 우선되며, 각종 특수이익을 노리는 '꾼'들이 염치 없이 나와 사회 일각의 세를 모으고 있다.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정파적 집단들이 소통 없는 선악 대결을 벌여 사회를 쪼개고 있다. 불편부당성의 반대인 사적·감정적 편향성이 팽배하며 이성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비판적 사고는 실종되어 내 편을 맹종하고 상대편을 무조건 배척하는 흑백논리가 국민에게 집단 최면을 걸고 있다. 정치는 이런 병폐적 모습을 보이며 블랙홀처럼 주변을 빨아들이고 있다. 양극적 정치 대결이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경제·안보·사회·문화의 이슈들마저 양극적 정치 논리에 물들게 하고 있다. 국가체제가 여러 위기 증후군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 블랙홀의 무한 팽창을 지성의 정신이 막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오늘날 지성마저 블랙홀로 흡수돼 사라지고 있다. 지성의 정신을 지켜야 할 지식인 중 상당수는 정치권에 편입되어 어느 한쪽을 편드는 데 동원되고 있다. 정치권 편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학자든 언론인이든 법·경영·의료·과학기술 전문가든 특정 정치 진영으로 갔으면 거기서 지성의 정신을 퍼뜨려 정치의 극단적·정파적 논리를 순화시켜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현실 정치에 묻혀 버린다는 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정치권에 영입된 고명한 지식인도 그악스러운 정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정치 논리에 매달리고 지성의 정신을 잊는다.

지성의 힘으로 정치를 순화하려면 정치권 바깥에서 엄한 비판의 목소리로 견제해야 한다. 안으로 발을 디미는 순간 격랑에 휩쓸려 헤쳐나올 수 없는 게 정치 블랙홀이다. 정치권에 들어가는 즉시 집단주의적 진영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설혹 정치권에서 탈진영의 소신과 양심을 펼치려 해도 곧 내부 도태된다. 정치 불신이 높은 유권자에게 호응을 얻지도 못한다.


20세기 초 미국 '개혁주의 운동'을 이끈 지식인 리더들은 대부분 특정 정당을 편들지 않고 외곽에서 정치권 전체와 국정운영 전반에 비판을 가했다. 광야에 흩어져 지성의 정신을 외친 이들 덕에 각종 병폐로 가득했던 미국 사회가 점차 깨어났고, 부정부패로 얼룩졌던 정치권이 쇄신될 수 있었다.
오늘날 지성계의 인사들은 정치 블랙홀의 팽창이 곧 지성의 위기라는 점을 유념해 정치권 외부에 머물며 비판적 견제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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