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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녹용을 진상하지 못하면 O로 대신해야 했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4.27 06:00

수정 2024.04.27 06:00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 영조 때 인삼과 녹용을 진상받는데 많은 폐단이 있어서 지방에서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림은 <본초강목>에 그려진 인삼(人蔘)(왼쪽)과 사슴[녹(鹿)]이다.
조선 영조 때 인삼과 녹용을 진상받는데 많은 폐단이 있어서 지방에서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림은 <본초강목> 에 그려진 인삼(人蔘)(왼쪽)과 사슴[녹(鹿)]이다.

조선의 영조 왕은 건강에 특별한 관심이 많아서 인삼이나 녹용 등이 들어간 보약을 많이 복용했다. 처방들이 하도 많아서 심지어 먹지도 못하고 버린 것들도 있었다.

어느 날 영조가 신하에게 물었다. “요즘 내가 먹은 인삼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자 의관이 답하기를 “최근 임신년부터 병술년까지 14년 동안 합쳐 보면 거의 100여근이 넘습니다.
”라고 했다. 거의 매일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복용한 셈이다.

내의원에서는 인삼을 수급해서 항상 준비해 놓는 일이 문제였다. 인삼과 같은 고가의 약재는 수급도 문제였고 품질도 고르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지방의 관리들을 다그쳐서 제 때에 품질이 좋은 인삼만을 올리도록 다그쳤다. 그러니 지방에서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함경남도 북단의 압록강 쪽에는 삼수(三水)라는 군이 있었다. 삼수 땅에는 11개 지역으로 고을이 나누어 있는데,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통해서 인삼을 캐서 징수하도록 했다.

병영에서는 병사들을 5일에 한 번씩 수를 헤아려서 병사명부를 작성했다. 그런데 병사명부에 들지 않는 병사들에게는 인삼을 캐서 올려야 했다. 병사들은 인삼을 캐지 못하면 대신 돈으로 내야 했다. 그래서 삼수지역에서 캘 인삼이 없으면 북쪽 국경을 넘어서 인삼을 캐는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문제는 병사로 징병되지 않으면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대신 인삼을 캐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농사일도 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아니 무슨 인삼을 매번 이렇게나 많이 캐 오라는 것이요? 산에 가면 인삼이 널려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요. 게다가 인삼을 못 캐면 돈으로 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요?”라고 따졌다. 그러자 지방 관리는 “조정에서 시키니 낸들 어떻게 하라는 건가? 내가 듣기도 지금 영조 왕이 인삼을 그렇게나 많이 먹어서 내의원에 인삼이 없어서 비상이 걸렸다고 하네.”라고 했다.

당시에는 인삼(人蔘)이라고 하면 바로 산삼(山蔘)이었다. 사실 의서에는 산삼이란 단어가 없고, 인삼만 있다. 의서에 적힌 인삼의 효능은 바로 산삼의 효능인 것이다. 인삼(人蔘)은 사람이 기른 삼이란 의미가 아니라 사람을 닮은 삼이란 의미다. 그래서 병사들은 산에서 산삼을 캐서 진상해야 했던 것으로 매번 산삼을 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자신들이 징수 받은 인삼을 모두 조정으로 진상하지 않고 빼돌리기도 했다. 또한 인삼을 캐야 할 병사들을 뇌물을 받고 빼주기도 했다. 그러니 인삼이 제대로 수급이 될 리 만무했다.

녹용은 더 문제였다. 삼수지역의 병영에서는 녹용도 진상해야 했다. 녹용(鹿茸)은 자라고 있는 도중의 사슴뿔을 말하고, 다 자라서 각질화가 된 것은 녹각(鹿角)이라고 한다. 산속을 헤매가 보면 간혹 사슴들이 뿔갈이를 하면서 우람한 나뭇가지처럼 큰 녹각이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을 수 있지만 녹각은 진상받지 않았다.

녹용은 허로(虛勞)와 정력이 약할 때, 성장이 더딜 때, 팔다리에 힘이 없는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보약으로 많이 사용하고, 녹각은 상처 회복과 뼈와 관절을 튼튼하게 하는데 사용한다. 녹용 중에서도 5월에 뿔이 갓 돋아난 연한 가지 두가닥이 나왔을 때가 가장 효과가 좋다.

그래서 병사들은 주로 봄에 사슴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사슴은 쉽게 발견되지 않아서 녹용 역시 구하지 못하면 대신 돈으로 내야 했다. 이 돈 역시 구하지 못하면 각 병영에서는 빚을 내서 대전(代錢)하도록 했다. 만약 올해 내지 못한 대전이 50냥이면 내년에는 100냥으로 늘어났다. 이 돈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눠서 징수했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병사들이 속한 마을은 직업이라고 해봤자 베를 짜거나 농사일을 하는 일에 불과했으니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런데 1년에 50냥이 넘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았다. 고생해서 짠 베와 농사지은 곡식은 자신들의 옷을 지어 입고 하루하루 연명하는데도 부족할 판이어서 이것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심지어 돈을 내지 못하는 병사들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도 했다.

한 병사가 가족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부족한 녹용값을 내라고 하니 어떡합니까?”하고 울먹였다. 그러자 병사의 아버지는 “안되겠다. 삼수지역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 녹용을 징수하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라고 했다.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삼수를 떠났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삼수지역의 각 고을에 포수를 2명씩 두어서 봄, 가을로 녹용과 짐승을 사냥해서 바치게 했다. 녹용은 왕실의 보약재로 쓰였고, 사냥한 사슴이나 노루는 종료제례의 제사에 사용되었다.

사슴고기로는 사슴젓갈인 녹해(鹿醢)를 만들었고, 사슴이 없으면 노루고기로 장해(獐醢, 노루고기 젓갈)를 만들어 올렸다. 사실 조정에서도 사슴은 노루와 달리 쉽게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슴이 없으면 녹용도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녹용은 삼수지역의 진상품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삼수지역의 포수들은 그 해에 녹용을 진상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 전년 것까지 합쳐서 진상해야 했고, 다음 해에도 못하면 그 후년에 한꺼번에 진상해야 했다. 그러니 녹용이 빚처럼 쌓여갔다. 만약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하면 그 대신 속(贖)으로 소 한 마리를 바치도록 했다. 속(贖)이란 죄를 지었을 때 재물이나 노동으로 그 죗값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한 포수는 최근 몸이 아파 거의 사냥을 할 수 없었다. 고을의 관리가 그 포수에게 “자네는 녹용도 진상이 안 되고, 몇 년 동안 사냥한 짐승도 없으니 대신 소 한 마리를 가져오게나.”라고 했다.

포수는 “내가 아무리 사냥꾼이지만 왕을 위한 사냥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신 농사일에 꼭 필요한 소를 바치라니요. 우리 가족은 굶어 죽으란 말이요?”라고 따졌다. 그러나 관리는 “이것은 조정에서 내린 법령이니 나도 어쩔 수 없네.”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포수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떠나 도망을 쳤다. 포수는 가족들에게 “만약 관청에 묻거든 내가 사냥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시오. 그렇게 말하면 별 수 없을 것이요. 내가 삼수에 있으면 집안이 망할 것 같소.”라고 했다. 가족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삼수지역에 감찰을 나온 장령(掌令, 감찰단)이 이러한 폐단을 접하고서는 상소문을 올렸다.

“요즘 북쪽 변방의 삼수지역의 각 고을에서는 인삼과 녹용 그리고 사냥한 짐승을 진상해서 올리는데, 폐단이 많고 불만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변방 지역의 병영의 군사들에게 오로지 인삼만을 캐서 올리고 녹용을 바치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리가 뇌물까지 받고 있으니 그 원성이 대단합니다. 특히 포수들에게는 녹용과 사냥한 짐승을 받치지 못하면 대신 소 한 마리를 징속하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침탈이옵니다. 굽어살펴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상소문을 접한 영조는 “인삼을 캐지 못하고 녹용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을 대전(代錢)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각 지방의 사정에 따라서 진상품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라. 또한 각 고을의 수령들이 포수들에게 잡히지도 않은 짐승을 강제로 진상하게 하거나 대신 소를 바치게 하는 것은 수령이 소를 훔치는 것이 된다. 앞으로 이런 폐단을 없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영조는 인삼과 녹용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진상품이란 사실 그 지역의 특산품을 올리는 것인데도, 구해지지도 않는 인삼과 녹용을 억지로 진상하라고 하면 어찌하란 것인가. 특히 녹용을 진상하지 못하면 소로 대신해서 진상하라고 한다면 왕의 건강을 위해서 농사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삼수지역의 관리들의 부조리도 문제였지만 영조가 인삼과 녹용을 즐겨 먹는 바람에 결국 백성들만 애를 먹었다.

* 제목의 ○은 ‘소’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 ○ 영조 39년 계미(1763) 9월 16일. 上覽咸鏡監司李昌誼鹿茸封進狀啓, 敎曰: “祭用鹿醢, 代以獐醢, 至載於太常誌, 甚非正名之義. 今因鹿茸封進, 乃覺豈無鹿而獨有茸乎. 不可不釐正太常誌中代獐一節抹去. 貢價參酌加下, 於祭享無名不正之歎, 於貢人無稱冤之弊.” 後領議政洪鳳漢奏曰: “鹿異於獐, 不可多得. 皇壇及宗社文廟外, 請依前代捧.” 上從之. (임금이 함경 감사 이창의가 녹용을 봉진하면서 올린 장계를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제사에 녹해를 쓰던 것을 장해로 대신하도록 할 것을 태상지에까지 기재하였는데, 이는 매우 명분을 바르게 하는 뜻이 아니다. 이제 녹용의 봉진으로 인하여 사슴이 없는데도 녹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따라서 태상지 가운데 노루로 대신하게 한 한 구절은 말거하도록 이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가를 참작하여 더 내림으로써 제향(祭享)에는 명분이 바르지 않은 탄식이 없게 하고 공인에게는 억울함을 일컫는 폐단이 없게 하라.”하였다. 뒤에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사슴은 노루와 달라서 많이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황단과 종사, 문묘 이외에는 청컨대 전대로 대봉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영조 42년 병술(1766) 10월 11일. 內局入侍. 上曰: “予所服蔘, 今至幾斤乎?” 醫官李以楷對曰: “自壬申至今過百餘斤矣.”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인삼을 복용한 것이 지금까지 몇 근에 이르는가?”하니, 의관 이이해가 대답하기를, “임신년부터 이제까지 백여 근이 넘습니다.”라고 하였다.)
◯ 영조 48년 임진(1772) 7월 7일. 掌令李師曾上疏, 論三水府邑弊民瘼 “중략. 其六, 邊堡砲手徵贖之弊也. 三水地十一堡, 各置砲手二名, 使之獵得鹿茸麝香, 以爲進上者, 乃是朝家令甲. 而每當春秋釋菜, 自本府推捉十一堡砲手, 使之獵獸, 以補享祀之需, 砲手不能獵捉, 則輒徵闕獵之贖, 乃以一牛納之. 各堡砲手, 畏其闕獵之贖, 種種逃走, 今年逃走, 則明年代定, 明年逃走, 則又明年代定. 大抵聖廟享祀之節, 事體至重, 自有八路各邑辦備通行之規 則本府推捉砲手, 責以獵捉, 已涉苟簡, 設令獵捉, 而本府砲手之在於近境者, 不爲不多, 則何必推捉邊堡砲手之應役於進上者乎? 況且一牛徵贖, 尤是非理之侵漁” 答曰: “爲一釋菜, 勒徵於十一堡二十二人砲手, 此爲守令之盜牛也. 所論皆涉切實, 倂令備局, 一切嚴禁. 至於捧牛事, 復若有此弊, 當該府使, 施以禁錮終身之律. (영조 48년 임진년 1772년 7월 7일. 장령 이사증이 상소하여 삼수부의 고을이 피폐함과 백성들의 폐단을 논했다. “중략. 여섯째, 변보의 포수에게서 징속하는 폐단입니다. 삼수 땅 11개 보에 각기 포수 2명씩을 두어 그로 하여금 사냥을 해서 녹용과 사향을 얻어 진상하는 것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조정의 법령입니다. 그런데 매양 봄, 가을의 석채를 당하면 스스로 본부에서는 11개 보 포수를 재촉해서 그로 하여금 짐승을 사냥하게 하여 이로써 제수에 보태며, 포수가 사냥해 잡지 못하면 번번이 사냥에 빠진 속을 받는데, 바로 소 한 마리를 바칩니다. 각보의 포수가 사냥에 빠진 속을 두려워하여 이따금 도주하기도 하는데, 금년에 도망하면 명년에 대정하고, 명년에 도주하면 또 그 다음 해에 대정하고 있습니다. 대저 성묘에 향사하는 의절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여 본래 팔도 각 고을에서 통행의 규정을 마련하여 준비하고 있으니, 본부에서 포수를 추착하여 사냥해 잡도록 하는 것이 이미 구차스러움에 관계되며, 설령 사냥해서 잡더라도 본부의 포수로 가까운 경내에 있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하필이면 변보의 포수로 진상하는 역에 응하는 자를 추착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소 한 마리의 징속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침탈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답하기를 “한 번의 석채를 위해서 11개 보의 22명의 포수에게서 늑징하니, 이는 수령이 소를 훔치는 것이 된다.
논한 바가 모두 절실하니, 아울러 비국으로 하여금 일체 엄금하게 하겠다. 소를 받아들이는 일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런 폐단이 있게 되면 해당 부사에게 종신토록 금고하는 율을 시행하겠다.
”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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