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청마의 행동은 짝사랑을 뛰어넘어 스토킹 또는 불륜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운은 남편과 사별한 홀몸의 미망인이었지만, 청마는 권재순이라는 부인이 엄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지금까지도 세기적 러브 스토리로 좋게 포장하고 있지만, 정신적 연애였다고는 해도 남편의 애정행각을 모를 리 없었을 부인의 속앓이는 어땠을까. 이영도도 유치환의 사정을 알았기에 답장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치환이 쓴 시와 같은 제목의 시로 마음을 전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그리움', 유치환), "생각을 멀리하면/잊을 수도 있다는데/고된 살음에/잊었는가 하다가도/가다가/월컥 한 가슴/밀고 드는 그리움"('그리움', 이영도)
이를 보면 유치환의 일방적인 구애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니 편지를 묶어서 책으로 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치환을 향한 마음이 드러난 이영도의 시가 여러 편 더 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무제1', 이영도)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함께 경남 통영여중 교사로 재직할 때였다. 청마는 만주에서 떠돌다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국어 교사가 됐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나 1945년 대구의 문예 동인지 '죽순'에 시 '제야'를 발표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산이여, 목메인 듯/지긋이 숨죽이고/바다를 굽어보는/먼 침묵은/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아픈 견딤이랴"('황혼에 서서', 이영도)
일찍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던 정운은 21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통영 언니 집에 머물며 수예점을 운영하다 통영여중 가사 교사가 됐다. 미모에 촉망받던 시인이었고 행실이 조신하던 정운에게 뭇 남성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청마도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는 여덟살 연상의 유부남이었다. 그때부터 청마는 죽는 날까지 거의 매일같이 정운에게 편지를 썼다.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도 연서를 썼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책 제목이 들어 있는 유치환의 시 '행복'의 뒷부분이다. 청마는 부산 등지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다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운도 부산에서 교사와 대학 강사로 일했고, 청마가 죽은 뒤 서울로 집을 옮겨 살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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