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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뜻밖의 HBM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5.22 18:16

수정 2024.05.22 18:16

SK하이닉스 AI시대 질주
영원한 승자 없는 칩전쟁
끈기와 기술에 미래 달려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하이닉스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돌던 시절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임기 말로 접어들던 때다. 하이닉스는 1983년 설립된 현대전자에서 출발한다. 현대그룹의 과감한 투자로 세계 20위권 반도체 기업에 오른 것이 1980년대 말이다. 그 후 승승장구해 수천억원대 흑자를 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으나 외환위기 전후 사정이 돌변했다.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쪼개지고 주력기업 현대건설이 부도가 났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불황 직격탄을 맞아 D램 가격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이 정부 빅딜 정책으로 합병한 LG반도체 인수대금이다. 2001년 채권단에 매각되고 하이닉스 간판을 단 것이 이때부터다.

시장에선 제2 대우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다급해진 정부는 미국 마이크론과 헐값매각 협상을 벌인다. 4조원 대금에 1조5000억원 저리대출까지 제시했던 굴욕적인 거래였다. 매각 일보 직전에서 이를 돌려세운 이들이 현장의 직원들이다. 경기 이천 공장에는 이상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직원들이 자발적 구조조정에 기꺼이 동참했다. 채권단이 영입한 삼성전자 출신 임원은 공장을 둘러본 뒤 "해볼 만하다"는 의견서를 냈다.

세계 반도체 역사에서도 희귀한 '블루칩' 프로젝트가 이때 단행됐다. 기존 장비를 개조해 고가의 첨단제품을 만드는 것인데 설비투자에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산·공정의 효율화, 수율 극대화로 추가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경영진과 직원들이 사활을 걸었다. 이천 공장에는 상상하지 못한 기록들을 달성한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가 '불가사(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였다. 이 시절을 겪은 하이닉스 임원이 당시를 떠올리며 쓴 책 제목이 '21세기 난중일기(고광덕·2011년)'이다. 전쟁 같은 시간이 왜 아니었겠나.

망할 것 같던 회사가 부활의 뱃고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생산의 달인들과 호흡을 맞추고 희망을 준 끈기의 기술진이 하이닉스의 심장이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이때 주목했던 기술이 실리콘관통전극(TSV)이다. 칩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구멍을 뚫어 이 속에 전기신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소재를 채워 칩을 연결하는 첨단 기술이다. 개발팀은 TSV가 기존 칩의 전기 성능과 공간 효율을 높이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봤다.

이 무렵 9년을 찾았던 하이닉스의 새 주인이 온다. 반도체 불황 막바지 기막히게 타이밍을 잡은 SK가 하이닉스 미래에 베팅을 했다. 미국의 팹리스업체 AMD와 하이닉스가 TSV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칩 개발 구상을 시작한 것도 이때다. AMD는 게이밍 그래픽처리장치(GPU)용 저전력 고대역 신형 메모리칩을 원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대역폭메모리(HBM)였다. 겹겹이 쌓은 D램 칩을 TSV 기술로 수직 연결해 데이터 처리속도를 혁신적으로 높인 메모리다.

시장에선 가성비에 의구심을 표했다. 하이닉스를 사들인 SK가 이를 무릅쓰고 공격적인 투자를 했다. 향후 용도에 따라 메모리가 세분화될 것이란 핵심 기술진의 제언을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인수 첫해 4조원 가까운 개발비를 쓰고 2013년 HBM 개발을 완수한다. 하지만 AMD는 우려했던 가성비 문제로 등을 돌렸다. 뒷방으로 물러날 처지였던 HBM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온 것은 뜻밖에 열린 인공지능(AI) 시장 덕분이다. 기존 대역폭 D램으론 AI 추론을 진행하기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미국 엔비디아가 HBM을 찾았다. SK의 HBM 독주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 양산 중인 4세대 HBM3는 SK 점유율이 90%다.

물러설 곳 없는 2등 기업의 절박함이 지금의 결과를 낸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1등 기업 삼성의 충격은 오래갈 수 있다. 전격 복귀한 새 반도체 수장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울 것이다. 하지만 AI 반도체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새로운 기회의 땅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끈기와 기술이 자산이다.
우리 기업들의 건투를 빈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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