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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무엇을, 누구를 위한 통일이어야 하는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5.26 19:18

수정 2024.05.26 19:18

문승현 통일부 차관
문승현 통일부 차관
1990년대 초 역사의 종언(End of History)이 이야기되던 시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고조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이은 독일 통일, 우리의 북방외교에 힘입은 중국, 러시아, 옛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 그리고 남북한의 유엔 가입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순간들이 숨 가쁘게 지나갔다. 물론 북핵 문제로 인한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4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통일부는 새로운 시대상황을 반영한 통일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요포럼, 통일이 있는 저녁, 찾아가는 北 스토리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학자, 언론인, 정치인, 법률가, 전현직 관료, 2030청년세대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청취해 오고 있다.
새로운 통일담론 형성에 있어 아래 요소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첫째,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북한과 성급하게 성과를 만들어 내려다가 통일의 지향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기준점이 있겠지만 우리의 헌법 가치, 즉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헌법상 소명을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담론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헌법 가치의 실현이 곧 인류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이는 우리가 통일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의 기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사람, 즉 개인의 가치와 자유가 우선돼야 한다. 통일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의 문제이기에 개인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는 통일 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독일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총리는 "민족의 통일은 국민의 자유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자유·인권 등 보편적 가치의 확장을 통해 모든 국민이 주인인 통일 한반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등한시해서는 안 되고, 아울러 자유를 선택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 지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가 통일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가야 한다. 북한은 작년 말 당 전원회의 이후 소위 2국가론을 주장하면서 교전 중인 적대 관계로 남북 관계를 규정하고, 통일 지우기를 진행하는 반역사적·반민족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통일 논의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된 것처럼 남북 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는 점에 기초해 북한의 올바른 변화를 견인해야 하며, 국내적으로는 통일 역량을 강화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대해야 한다.

넷째, 한반도 통일을 위한 국제적 여건 조성이다. 통일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작년 8월 18일 미국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에 대한 지지가 문서로 이뤄지고 뒤이어 한·영, 한·네덜란드 정상회담에서 이러한 지지가 재확인된 것은 통일외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계기에 국제사회로부터 우리의 통일 비전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향후 통일 과정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통일은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준비된 자들에게만 허락된 권리이다.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는 결국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현재 남북 관계가 매우 어려운 시기이지만 통일을 위한 국민적 담론을 모아가고, 국민의 힘을 결집해 나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우리 내부 역량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어떤 통일 기회도 우리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문승현 통일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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