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50대 중반의 지인이 상속세와 얽힌 웃지 못할 가족사를 전했다. 지인의 부친은 부동산과 현금, 금융상품 등을 합쳐 100억원대 자산가다. 남다른 감각이 있었는지 손대는 부동산마다 성공했다고 한다. 부친은 10여년 전부터 어린 손자들에게 매달 100만~200만원을 입금해 오고 있다. 가끔은 500만원을 용돈 명목으로 보내기도 했다. 용돈 입금을 위해 매달 송금 은행지점은 달리 했다. 혹시 모를 세무조사가 무서워 발품을 판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친이 손자 한명당 보낸 용돈은 어느덧 1억원이 넘었다. 세무당국의 눈을 피하려는 부친의 '고액 용돈 보내기'는 현재이자 미래진행형이다. 서민들에게는 손가락질 받을 일이지만 이런 자산가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 한평생 피땀과 행운으로 일군 재산의 절반을 덜컥 상속세로 내야 한다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명망 높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던 상속세. 이제는 개인의 문제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법)상 30억원 이상을 상속 또는 증여할 경우 50%의 최고세율이 적용된다. 강남 국평(전용면적 84㎡) 아파트 시세가 30억원 넘는 곳들이 속출하는 세상이다. 많은 국민들이 상속세와 전쟁을 치르는 시대다. 상증법상 최고세율 요건은 2000년 개정 이래 24년째 유지되고 있다.
사실 상속세 하면 떠오르는 게 재벌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중에 상속세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있는가. 최근 조석래 명예회장이 별세한 효성만 해도 4000억원이 넘는 상속세 마련이 발등의 불이다. 이미 조현준 회장과 조현상 부회장에게 상당한 지분 승계가 이뤄졌다. 하지만 상속 지분 때문에 주식담보대출이나 지분 매각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상속세 리스크 하면 삼성을 빼놓을 수 없다. 2020년 10월 별세한 이건희 선대회장은 총 26조원 규모의 유산을 남겼다. 삼성전자 등 핵심 계열사 지분이 19조원 상당이다. 나머진 부동산, 미술품, 현금성 자산 등이다. 피상속인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유족들은 12조원의 상속세를 떠안았다. 2026년까지 6년간 매년 2조원씩을 납부해야 한다. 12조원이면 현재 자산 기준 코오롱이나 OCI 그룹을 매각하는 셈이다. 홍라희 전 리움 관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세 모녀는 상속세 마련 때문에 3조원 가까운 지분을 순차 매각했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지분 매각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대신 신용대출과 계열사 배당소득 등으로 근근이 마련하고 있다.
경영승계의 모범사례로 늘 꼽혔던 LG도 상속세 난제를 겪었다. 현대차그룹도 정의선 회장의 상속세 이슈는 잠재된 복병이다. 크든 작든 국내 기업에 상속세 이슈는 상수다.
많은 지분을 보유한 창업 기업인에서 2세 기업인으로 승계 시엔 상속세 문제가 불거지지 않는다. 보통 2세에서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속세 폭탄이 현실이 된다. 100%였던 총수 지분이 2대 50%를 거쳐, 3대에 25%로 줄면 경영권 리스크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중간에 유상증자라도 하면 승계 지분은 더 쪼그라든다.
경제계가 상속세 제도 개선을 요구한 건 오래된 일이다. 최대주주 할증과세까지 적용하면 기업인의 상속세율은 60%까지 오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그동안 재계가 상속세 화두를 꺼내면 '재벌특혜'로 치부됐다. 시대착오적이다. 상속세 낮춰주는 걸 부의 세습으로 보는 건 20세기 정서다. 경영을 물려받은 기업인에게 지분은 개인의 몫이 아니다. 영속 기업을 위해 지켜야 할 뿌리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실시한 국민인식 조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상속세 피상속인(사망자)이 2배 정도 늘었다고 한다. 상속가구가 급증하면서 국민 10명 중 7명이 상속세 부담 완화를 원했다고 한다. 상속세는 재벌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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