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이렇게 흘러간 데는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쳤다. 제조 과정에서 적치된 리튬 배터리가 가장 큰 위험요소였다. 1차 전지는 충전된 상태로 제조돼 발화 위험이 내재돼 있다. 리튬 배터리는 분리막이 손상되면 양극과 음극이 접촉해 과열되면서 화재와 폭발이 일어난다. 배터리 1개에서 시작된 화재는 순식간에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열 폭주(thermal runaway)’ 현상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엔 3만5000개가 넘는 리튬배터리가 적치되고 있었다.
소화기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리튬 배터리를 진화할 수 있는 소화기는 없다. 현행법상 국내에서 배터리 등을 포함한 ‘금속화재’는 소방법상 화재 유형으로 분류돼 있지도 않다. 소방청 고시인 '소화기구 및 자동소화장치의 화재안전기준'상 화재 종류에는 일반화재(A급화재), 유류화재(B급화재), 전기화재(C급화재), 주방화재(K급화재) 등이 정의돼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금속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전용 소화기는 비치할 근거도 모호하다. 향후 사고 책임을 따지는데도 공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배터리 폭발 후 순식간에 발생한 연기는 직원들의 발목을 잡았다. 탈출한 인원 일부는 2층에서 뛰어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직원들은 사실상 대피 동선을 파악하지 못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42초 영상에서도 대피를 시도하는 화면은 보이지 않는다. 경기남부경찰청 아리셀화재 사고 수사본부는 아리셀 근무자들을 대상으로 안전교육 등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조사중이다. 조사 과정에서 일부 아리셀 근무 관계자는 안전교육이 부실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도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방 인력은 진화 도중 현장 폭발과 함께 외부 벽재가 무너져 내리자 초기에 내부 진입을 감행할 수 없었다. 사후 진단 결과 공장 외부 벽재가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져 화를 더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샌드위치 패널은 철판 속에 스티로폼과 우레탄 등의 단열재를 넣은 구조로 돼 있다. 보온은 뛰어나지만 화재엔 취약하다.
희생자들 대다수는 외국인이다. 이에 불법파견 정황도 짙어졌다. 아리셀측은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가 모두 도급 인력이며, 인력 공급업체가 업무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당시 인력 공급업체였던 메이셀은 “우리는 아리셀에 공급하는 근로자에게 근무지로 향하는 통근버스 사진만 문자로 보낸다”고 밝힌 바 있다. 현행 파견법은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업무는 파견이 가능한 업종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았던 일차전지 검수와 포장 업무는 직접생산공정업무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게 법조계의 판단이다.
국민의 힘 추경호 대표는 이번 사고에 대해 “부끄러운 후진국형 사고”라며 “사고가 난 공장은 사고 한달 전 자체 안전점검에서도 스스로 미흡하다고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부실한 국가 안전 시스템이 불러온 인재(人災)라는 지적이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화학적 폭발 화재는 매년 100건 정도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도 우리나라는 리튬 소화기 인증 기준 조차 마련해 놓지 못했다. 적절한 화재 진압 도구가 없었다면 연쇄 화재를 방지할 수 있도록 위험물 적치 기준 등을 강화했어야만 했다. 정부는 화재 원인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하지만 이를 1개 업체의 과실로만 규정해선 곤란하다. 추가 참사가 나오지 않도록 취약한 안전 시스템을 철저히 재정비해야 한다.
ksh@fnnews.com 김성환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