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피해자 두번 죽이는 '기습공탁'

서민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7.02 18:59

수정 2024.07.02 18:59

서민지 사회부 기자
서민지 사회부 기자
지난 2022년 12월 공탁법 개정으로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됐다. 형사공탁은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법원에 일정 금액을 맡겨 피해 보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 인적사항을 알아야 공탁을 할 수 있었지만, 공탁법 개정에 따라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해도 공탁이 가능해졌다.

형사공탁 특례제도는 '피해자 보호'를 목적으로 도입됐다. 형사사건에서 합의나 공탁이 유리한 양형 요소로 참작되는 만큼, 피고인이 피해자의 정보를 알기 위해 무리하게 접근하거나 합의를 압박하는 등 2차 피해로 이어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 개선의 본래 취지와 달리 피고인이 이득을 볼 목적으로 공탁금을 악용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선고 직전 형사공탁을 하는 '기습공탁'이 대표적이다. 피해자가 재판부에 공탁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기 전 선고가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원에서 감경 사유로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기습공탁 사례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운전자 고모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청담동 모 초등학교 앞 스쿨존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초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했다. 고씨는 선고 직전 공탁금을 냈고, 법원은 이를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수령 의사가 없다는 점을 반영해 공탁금을 제한적으로 고려했다. 신림동에서 흉기난동을 벌여 4명의 사상자를 낸 조선은 2심 선고 4일 전에, 축구선수 황의조의 사생활 영상을 유포하고 협박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황씨의 형수는 1심 선고 1일 전에 공탁금을 냈다.

사실상 공탁이 쉬워지면서 피해자들은 또 다른 불안감에 맞닥뜨리게 됐다. 합의를 원하지 않고, 공탁금을 수령할 생각이 없음에도 피고인이 공탁금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감형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습공탁 논란이 커지면서 법원 역시 공탁을 감경 사유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황씨 형수의 2심을 담당한 재판부는 "원심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2000만원을 형사공탁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반영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선고 직전에 돈을 내는 기습공탁을 법원이 기계적으로 받아들여 형을 깎아주면 피해자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합의에 실패한 피고인이 피해자가 받을 의사가 없는 돈을 내밀어 "합의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식으로 꾸미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일방적인 행동이 법정에서 고려되는 일이 없길 바란다.

jisseo@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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