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황두식을 연기하다가 진짜 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죠. 기존 작품과 비교해 제 삶에서 나온 캐릭터라 무대에 내려오면 더 외롭고 공허하고, 또 공연이 끝나는 게 아쉬워요.”
사이먼 스톤 연출 연극 ‘벚꽃동산’에서 자수성가한 기업가 황두식을 연기한 박해수는 오는 7일 폐막하는 이 작품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쉽다. 지난 6월 4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러시아 귀족의 몰락을 그린 안톤 체호프의 고전을 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재창작했다. 스톤은 지난 1월 한국을 찾아 이번 작품에 출연한 10명의 배우들과 워크숍과 인터뷰를 통해 캐릭터를 구성하고 대본을 집필했다.
회사의 경영 악화로 기업과 저택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제벌 2세 손재영(손상규 분)·도영(전도연 분) 남매와 그들 가족 및 주변인의 이야기로, 연극은 아들의 죽음 후 미국으로 떠났던 도영이 둘째 딸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황두식은 과거 남매 부모를 모셨던 운전기사의 아들로 어린시절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도영과 이 집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 이에 경영악화로 무너져가는 회사와 저택을 지킬 방법을 제안한다.
박해수는 “황두식이라는 이름을 제가 (연출께) 제안했다”며 “이름에 먹을 식자를 넣어 밥은 먹고 살라는 느낌을 담았다”고 말했다. “두식의 부친처럼 제 아버지는 비록 폭력적이진 않았지만 거대하고 무서웠죠. 목소리도 컸어요. 저는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죠. 처음에 연극한다고 했을 때 ‘딴따라’ 취급하는 눈빛을 보이기도 했지요.” 세상 모든 아들처럼 그 역시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했다. 이에 (공연하는 동안) 연극으로 아버지께 인정받고 자신을 증명하려고 했던 순간이 많이 떠올랐다고 한다.
연극의 중심 배경인 산 모양을 닮은 하얀 저택은 황두식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리움의 공간이다. 박해수는 “처음엔 두식이 ('오징어 게임'의) 상우처럼 미래지향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였지만, 결국은 과거에 얽매여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벚꽃동산이 보이는 그 아름다운 저택은) 무섭던 아버지가 굴욕을 당하던 순간을 목도한 상처의 공간이자 어머니가 부재한 두식에게 처음으로 호의를 베풀었던 도영과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라며 "도영이 몸을 숙여서 두식의 상처를 닦아준다는 지문이 있는데, (도영의) 체취가 다가온 그 순간이 마치 엄마의 품과 같았을 것 같고 동시에 여자로도 느껴졌을 듯 한데. 그러한 따뜻한 순간이 두식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저택은 애증의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전도연 선배님이 등장인물 중 이 집을 가장 사랑하는 건 (집주인 가족이 아닌) 두식인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어쩌면 두식이 집을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부연했다.
■ "동료 배우들은 마치 서로의 에어백 같은 느낌"
'벚꽃동산'은 배우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마치 음악처럼 리드미컬한 작품이다. 딱히 주조연할 것 없이 모든 배우들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있고, 이들 간 앙상블이 돋보인다. 박해수 역시 이러한 점을 언급하며 “배우들이 마치 유기체 같고, 서로가 서로에게 에어백이 되어주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사이먼 스톤이 연극을 만드는데 있어 약속과 정보 전달보다는 배우들간 믿음을 강조하며 실수가 나와도 어떤 순간이 만들어지니, 그냥 자유롭게 (대사를) 뱉어 라고 했죠. 솔직히 저는 연기할 때 미리 계획하고 접근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방식이 처음엔 긴장됐지만, 지금은 재밌고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특히 유병훈, 전도연 선배, 손상규, 최희서 배우 등 모두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를 밀어줍니다.” 덕분에 무대 위에서 황두식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듯 했다.
박해수는 첫 공연 당시 중요한 대사 8줄을 빠뜨리는 큰 실수를 언급하며 동료 배우들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당시 전도연을 비롯한 배우들의 재치 있는 도움 덕분에 1부가 끝나기 전 두식의 핵심 대사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대사를 날리고 그 뒤 대사를 했는데, 전도연 선배가 받아줬죠. 그러다 두식이 진짜 하고 싶었던 핵심 대사를 뒤늦게 뱉었는데, 모든 배우가 눈으로 저를 지지해주면서 애드립으로 다 받아줬고, 그 순간을 살아있게 만들어줬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배우들에 대한 탄탄한 믿음이 있었기에 (순서가 바뀌어 버린 대사를 늦게나마 다시 치는) 그런 시도를 할수 있었다”며 “사이먼도 제 실수를 알아챘는데, 괜찮다고 말해줬다”고 부연했다.
그는 요즘 무대에 오르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공연이 끝나면 외롭고 공허하다. 극중 두식의 ‘(기업가로) 성공했지만 공허하다’는 대사도 있는데, ‘오징어 게임’의 글로벌 성공 이후 세계적 연출가의 러브콜을 받을 만큼 성공한 그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답변을 들어보니 그것은 마치 배우의 숙명과 같았다.
박해수는 “제 몸을 빌려서 한 캐릭터를 몸으로 받아들인 뒤 나를 통로삼아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직업이다"며 "모든 배우가 느끼는 그런 감정인데. 온전히 이 작품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끝나는 시점이 온다는 것을 안다. 이별을 해야 하는 허탈감 같은 게 기본적으로 있다. 또 일이지만 마음과 정성을 쏟기 때문에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답했다.
스톤 연출가는 한국영화 팬으로도 유명하다. 박해수는 “제 출연작을 다 봤더라”며 “제가 갖고 있는 피지컬과 아우라 이면의 연약한 면에 주목해주셨다”고 말했다.
한편 ‘벚꽃동산’은 내년 호주 애들레이드를 시작으로 해외 투어를 예정하고 있다. LG아트센터가 기획 단계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K-연극이다. 박해수는 “배우들 모두 호주 공연에 가길 바란다”며 유난히 애정이 가는 이 작품의 해외 나들이에 기대감을 표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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