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본은 가지고 다니기에 편하도록 작게 만든 책이다. 값도 싸다. 오락물이 넘쳐나는 요즘, 독서 인구는 점점 줄고 있다. 종이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까지는 문고본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는 중고생들이나 문학청년들이 많았다. 책을 읽고 싶어도 비싸서 못 읽던 시절에 짜장면 한 그릇 값보다 저렴했던 문고본은 복음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본의 경우 1927년에 창간된 이와나미 문고가 문고본을 정착시킨 효시라고 한다. 일본은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레클람 문고나 카셀 문고가 유명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페이퍼백 또는 포켓북이라고 불리는 문고와 비슷한 작고 저렴한 책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후 정음문고에 이어 한국 출판계의 대부 정진숙(1912~2008) 회장이 창립한 을유문화사가 을유문고를 펴냄으로써 본격적인 문고본 시대를 열었다. 학문과 예술의 편협한 특권화를 물리치고 대중의 계몽과 지식 향상이라는 출판사의 목표에 을유문고는 딱 들어맞았다. 최초에 52권으로 기획됐지만 6·25가 터져 절반만 펴냈고, 1969년 정치·법률·경제·철학·역사 등 모든 영역을 다룬 새로운 을유문고가 탄생했다. '한국의 문화(문일평)'를 제1권으로, 을유문고(사진)는 1989년까지 300권이 간행됐다.
1966년 윤형두 회장(1935~2023)이 설립한 범우문고는 사상, 문학, 에세이 등의 분야에서 문고본을 발행해 인기를 얻었다. '범우에세이문고' '범우소설문고' '범우사르비아문고' '범우오뚜기문고' 등이 잇따라 나왔다. 1985년에 선보인 범우문고의 1권은 피천득의 '수필'이었고 2권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였다. 윤 회장은 "경부고속도로가 뚫린 덕에 더 많이 팔렸다"고 했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 승객들이 문고본을 사서 읽었다는 말이다.
어떤 이가 시인 서정주를 키운 것은 '8할의 바람'이었다면, 문청(文靑)들을 키운 것은 삼중당문고였다고 썼다. 삼중당문고는 문고본 중에서도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삼중당은 1931년 서재수 선생(1907~1978)이 창업한 1세대 출판사다. 삼중당문고는 1972년에 1권이 나온 이후 1975년에 100권을 돌파하고 1990년까지 500권이 출간됐다. 많을 때는 매월 평균 10권씩 발행했을 만큼 엄청난 출판 기록이었고 한 해 250만부가 팔릴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밖에도 여러 문고본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줄을 이어 출간됐다. 민중문고, 신세계문고, 사상문고, 양문문고, 신양문고, 탐구신서, 현대과학신서, 박영문고, 서문문고, 삼성문고, 동화문고, 세종문고, 신구문고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고본들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1980년대 들어 출판 기술의 고급화로 문고본은 급격한 침체기를 맞는다. 이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핸디북'을 판매하는 등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문고본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유명했던 문고본들이 이젠 전설로 남았지만, 지금도 적잖은 판매량을 올리고 있는 문고본들은 있다. 범우문고(295권)는 가장 오래된 브랜드로서 여전히 건재하다. 무소유는 법정스님의 입적과 절판 유언이 내려진 2010년까지 300만부가 팔렸다. 범우문고의 총 판매량은 5000만부에 육박한다고 한다. 2000년대 전후에 나온 빛깔 있는 책들(281권), 시공 디스커버리총서(141권), 책세상문고(약 300권) 등도 수백만부씩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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