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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외교 망치는 관료조직의 정치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7.24 18:05

수정 2024.07.24 18:31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근 미국 연방검찰은 한국계 미국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을 기소했다. 그가 한국 정부의 비등록 요원으로 일하고 국정원으로부터 부적절한 물질적 혜택을 받았다는 게 죄목이다. 이 사건은 한국 외교의 큰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의 기강과 역량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지난 정권을 탓한다. 지난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 야당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력 부재로 이 사건이 불거진 것이라고 현 정권을 탓한다. 그러나 특정 정권, 특정 인사들 탓으로만 돌린다면 표피적이고 지엽적인 증상만 짚는 셈이다. 정작 지난 수십년 고질적으로 이어진 근본적 문제점은 따로 있다.

역대 정권마다 대외관계 관료조직을 지나치게 정치화했다는 게 그 근본적 문제점이다.
정권을 새로 쥔 대통령과 측근은 우선 정부 기관의 핵심 요직을 바꾸게 마련이다. 외교부 등 대외관계 담당 기관도 예외이지 않다. 국정원으로 대표되는 해외정보 조직도 고위직은 당연히 물갈이 대상이다. 그런데 어느 선까지는 용인되는 물갈이가 과도한 정파성에 휘둘려 특정 계파나 특정 지역 출신을 통으로 쳐내며 조직 전체를 흔들고 위축시켰다는 게 그동안 수십년의 현실이다. 정권별로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런 정파적 '숙청'을 반복해 대외관계 관료조직을 깊숙이 정치화했다.

모든 기관이 그렇지만 특히 대외 담당 기관은 조직상 변화뿐 아니라 지속성도 중시해야 한다. 한편으로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응하고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게 종종 조직을 변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화의 중심요소인 관료가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자기 일을 충실히 지속하며 조직의 전문성·일관성·안정성을 기할 필요도 있다. 그래야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세계 무대에서 두터운 인적 네트워크를 장기간 유지하며 상대방에게 신뢰를 줘 요긴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변화와 조화를 이뤄야 할 지속성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관료조직의 독립성을 높은 수준에서 보장해야 생기는 귀한 자산이다. 정권 교체 때마다 조직의 최고위 정무직뿐 아니라 중간급 관료직까지 대통령이나 최측근의 입김으로 들썩거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관료가 어떤 정치 줄에 섰는지에 의해 좌천, 징계, 퇴출 혹은 반대로 벼락감투, 실세 등극이 따라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랫동안 역대 정권마다 대외 담당 기관들을 과도하게 정치화하며 조직의 지속성이라는 자산을 날려버렸다. 이와 함께 전문성·일관성·안정성도 깨졌다. 이 근본적 문제점으로 인한 증상 중 하나가 수미 테리 사건이다.

테리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 20년 이상 존재감을 과시했다. 언론에 자주 나와 대중 인지도도 높다. 그러나 아주 얻기 힘든 고급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회의(NSC) 등 미국의 안보·정보기관에 근무했으나 오래 자리를 지킨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오랜 기간 컬럼비아대학의 연구소, 윌슨센터, 미국외교협회(CFR) 등 여러 싱크탱크를 옮겨 다닌 관변학자다. 외교무대에서 한미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으나 은밀하게 정보 거래를 할 만한 핵심 위치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지난 십수년간 의존하며 과잉 호의를 베풀고 물질적 혜택까지 제공했다는 건 미국 실정법 위반 여부를 떠나 우리 외교·정보 조직이 정치화돼 그만큼 자체적인 능력이 미흡하고 인적 네트워크가 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대를 이어 외교·정보 관료조직을 정치화한 건 심각한 일이다. 워낙 근본적 문제인 만큼 그 결과는 테리 사건만으로 끝이 아닐 수 있어 우려스럽다.
역대 정부의 핵심 관계자들은 이제라도 상호 남 탓보단 철저한 자기반성과 과감한 개선 노력에 힘써야 한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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