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목장의 역사지리
삼국시대부터 목축 기록 전해져
조선시대 국영목장 운영되던 제주
목장 경계 ‘잣성’ 흔적 남아있어
대관령 삼양목장·서산 삼화목장
국내 대규모 목장 개발 대표사례
삼국시대부터 목축 기록 전해져
조선시대 국영목장 운영되던 제주
목장 경계 ‘잣성’ 흔적 남아있어
대관령 삼양목장·서산 삼화목장
국내 대규모 목장 개발 대표사례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志)에는 탐라현에 있던 제주 목장이 나온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에 삼별초가 원나라 지배에 항거하면서 탐라에서 난을 일으켰고, 4년 후 김방경이 이를 토벌했다. 그 결과 고려는 다시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충렬왕 3년(1277년)에 원나라는 몽고말 160마리를 제주로 들여와 그들의 목마장으로 삼았다. 충렬왕 21년(1295년)에 탐라를 돌려받아 1300년부터 고려 조정의 말을 길렀다. 제주도는 안전하고 평탄한 넓은 초지로 목장지에 안성맞춤이었다.
조선 세종은 제주 해안변의 주민들과 목마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라산을 중심으로 둥글게 성을 쌓아 10개소의 목장을 유지했다. 주민들은 이를 '잣성'이라 불렀는데, 대동여지도에는 하잣 경계선과 함께 목장 위치가 10곳 표시돼 있다. 지금도 돌담 잣성을 잣, 잣담으로도 부른다.
고도에 따라 하잣(15~250m), 중잣(350~400m), 상잣(450~600m)으로 나누어지고 말들은 상잣과 하잣 사이의 공간에서 키워졌다. 상잣은 고도가 높으면 추운 날씨에 위험하고 먹이도 부족하니 말들이 더 이상 못 올라가게 한 것이다.
잣성은 현재도 상당 부분 남아 있다. 2023년 현재 제주의 상업적 목장은 7개 내외로, 여러 곳에 분산된 방목지 및 승마장 4~5곳이 있다. 2001년 발행 지도에 표기된 목장은 15개에 이른다. 개별목장, 학교목장, 협업목장 등 다양한 명칭을 달고 있다. 1980년대 초기에는 목장 수가 120개를 넘었고 소, 말, 돼지, 염소, 양 등이 방목됐다.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 등에 목장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조선 6축'이라 하여 소, 말, 양, 돼지, 닭, 개를 중시했다. 목축은 개인 집안에서도 이뤄졌지만 대규모 면적의 목장은 조정, 지방관리, 부유층 등에 의해 유지됐다. 한양 십리 뚝섬에서는 임금을 위한 군마를 기르면서 군사훈련, 왕의 행차와 사냥, 무예 관찰 등을 시행해왔다. 당시 뚝섬 마장의 모습을 그린 '진헌마정색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목장으로 섬 제주와 부산 영도 목장이 있다. 섬 외에도 곶(串)과 같은 좁고 길게 바다로 뻗은 지역에서도 말을 많이 길렀다. 조선시대 포항 장기곶 목장과 서산 대산목장이 좋은 사례다.
경남 함안군지와 지도를 보면 현재까지 방목(放牧) 자체가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함안군 가야읍 동북부 지역 일대의 버려진 초지 '한밭들', 홍수 시 물에 잠기는 '둘안 습지'도 언급된다. 홍수가 들면 습지가 되어 농사가 불리해 평상시에도 방목을 했다. 옛 함안 지리지 '함주지(咸州誌)'에 방목촌, 수우방목, 방목시장 등이 기록돼 있다.
세조 7년(1461년)에 오키나와에서 암물소 2마리를 수입해 길렀고, 연산군 8년(1502년) 늘어난 물소들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나눠줬다는 기록도 있다. 가야읍 도항리와 충무동 경계 고개를 지금도 방목고개(放牧峴)라고 부른다. 주로 소와 염소를 풀어서 길렀다.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서산 대산지역(현 대산읍)에 다리곶·흥양·토진·맹곶 등에 흩어져 있던 목장들을 통합해 대형 목장을 조성했다. 대산은 완만한 지형에 물과 풀이 풍족해 목장지로 적절했다. 서산 지리지 호산록(湖山錄)은 1619년(광해 11년) 정월 서산의 선비 현여현(韓汝賢)이 지은 서산 사찬읍지(私撰邑誌)로 대산목장을 기록하고 있다.
선조 때 감목관(監牧官) 1명을 두었다. 한때 목자가 100명에 이르고 사수(射手)도 많아 호랑이가 목장에 들어오면 몰아내거나 잡았다. 일부 불량한 목자(牧者)는 나쁜 무리와 결탁해 말들은 잡아 먹거나 판매했다. 동네 주민들도 함께 좋아했다. 대산목장을 둘러싸고 일어난 관리와 지역민들의 불합리 행위에 관한 기록도 여럿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원도 북부 추가령구조곡에 위치한 강원도 세포에 서구식 대형 목장이 들어섰다. 당시 이름은 세포목양지장(洗浦牧羊之場)이었다. 일본의 조선 수탈을 위한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에 의한 대규모 목양장이었다. 추가령구조곡고지의 완만한 지형과 냉량한 기후조건으로 목장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당시 조선 최초의 스키장도 함께 조성됐다. 이곳은 해방 이후에도 목장으로 유지됐다.
1972년에 개설된 대관령 삼양목장은 한국 목장의 상징이다. 해발고도 800~1450m 목축장에서 양과 소를 키운다. 풍력발전기와 함께 호텔 시설을 가진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방목을 한다. 이 기간 소들이 스스로 운동과 함께 건강과 위생도 챙긴다는 것이다.
작가 이효석은 1930년대 국민에게 우유를 많이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水道)와 마찬가지로 우유도(牛乳道)를 만들어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언제든지 (우유가) 쏟아지게 하자"고 수필 '채롱'에 썼다. 1969년 한국에서도 우유와 낙농제품을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독일의 협력으로 안성목장이 축조됐다. 여기서 많은 유제품이 전국에 공급되고 있다. 현재도 목장에서는 소, 면양, 돼지, 염소 등이 길러지고 있다.
낙농업을 중시하는 목장으로 잘 알려진 성이시돌목장, 임실목장 등도 근대 한국인의 우유와 유제품 공급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성이시돌목장은 1954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한라산 중산간 한림에 만들어졌고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면양, 종돈, 소 등이 입하돼 발전해왔다. 임실목장은 1959년 한국 선교사로 온 지정환 신부의 도움으로 1966년 임실치즈 목장이 세워졌고, 2003년부터 임실치즈밸리로 대규모 지역화되면서 국민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는 638만평에 달하는 넓은 목장이 있다. 삼화목장이다. 충남 부여 출신의 거물 정치인 김종필씨가 1969년 여섯 마을의 땅을 모두 사들여 지은 목장으로 한우, 젖소, 양을 키웠다. 당시 울창한 숲을 제거하고 헬리콥터로 외국 목장용의 풀씨를 풀어 목장 초원을 만들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김종필씨는 삼화목장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현재는 공식명칭 '축협 한우 개량 사업소' 혹은 '서산목장'으로 불리고 있다. 삼화목장은 대관령목장과 함께 국가경제 발전에 따른 대규모 목장 개발의 대표적 사례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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