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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서해서 만든 소금과 평창서 기른 콩을 맞바꾸는 물류 중심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8.12 18:41

수정 2024.08.12 19:09

강원도 원주 문막 나루터
이효석 소설 '산협'에 잘 드러나
어물과 농산물이 주요 교환 상품
이를 돕는 상인 '바꿈이'라 불러
1930년대 문막 섬강변 물굽이(水曲) 나루터에서 자전거를 싣는 모습. 멀리 보이는 삼각산은 지금의 문막 건등산이다.
1930년대 문막 섬강변 물굽이(水曲) 나루터에서 자전거를 싣는 모습. 멀리 보이는 삼각산은 지금의 문막 건등산이다.
1930년대 강원도 문막 지형도 문막읍사편찬위원회 제공
1930년대 강원도 문막 지형도 문막읍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메필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1942)이 1941년 발표한 단편소설 '산협(山峽)'은 한 마을에서의 복잡한 친인척 간의 비극적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배경으로 1930년대 강원도 평창을 비롯한 영서 지방의 농업구조와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원주 문막의 소금받이와 나루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창에서 생산한 콩을 문막 나루터까지 나르고, 서해에서 한강과 섬강을 따라 올라온 소금과 바꾸는 장면이다. 문막 나루터에는 지금도 석지 나룻길, 물굽이(물구비), 개여울, 시무리(스무리), 낡은터(나루터), 삼괴정(三槐亭) 등 나루터 연관 지명이 남아 있다.


평창 소금받이의 나루터 오르내림 과정을 보면 강원도 내륙 산간 농촌에서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의 메밀꽃밭에 붙인 '소금을 뿌린 듯'이라는 기막힌 수식어도 소금받이를 관찰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1930년대 당시 영서 지방 산골에서 소금은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동해의 소금 생산이 없어, 먼 서해안에서 수운(水運)으로 문막까지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금받이는 마을을 대표하여 콩을 모아서 소금과 바꾸는 작업 책임자이다.

"소가 두 필에 콩 넉 섬을 실구 갔었겠다. 소곰인들 흐북히 받어오지 않으리." "바닷물루 만든다던가. 바다가 멀다 보니 소곰은 비상보다 귀한 걸…."

문막 나루 강가에는 서울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섬이 첩첩이 쌓였다. 문막은 서해에서 남한강을 거쳐 섬강으로 올라오는 수운의 관문으로 원주, 횡성, 평창과 연결되는 물류 중심지였다. 한강 수운선은 바닷배에 비하여 밑바닥이 평평하고, 뱃전이 얕고, 길고 폭이 좁았다. 최소의 운행을 위한 수로는 수심이 3m, 강폭이 10~15m 정도가 요구된다.

강에 토사가 많이 쌓이면 지역민들이 강의 토사를 파내고, 더러는 강가에서 밧줄로 당겨 배를 이동했다. 물론 상당한 수고비를 받았으며 더러 마을의 중요 사업이었다. 한강변에는 수운선들의 안전을 비는 다수의 신당(神堂)이 있었다. 신륵사 같은 강변 사찰과 불적(佛蹟), 제단 등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했다.

남한강 지류 섬강 입구의 흥호리에서 섬강 상류 수운은 38㎞까지 이어진다. 대형 선박은 약 15㎞에 있는 원주 문막과 호저면 망강포까지 간다. 서해에서 문막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은 평균 약 11일, 하행은 6일이 걸린다.

주요 물물교환 상품은 해안의 소금, 어물(염장·말림)과 새우젓이 대종을 이루고, 평창 등 강원도에서는 주로 콩이 많고 참깨, 꿀, 담배, 대마 등 농산물과 목재(평창 적송 등)와 숯 등 임산물이 교환의 대상이었다. 이를 돕는 현지의 상인은 '바꿈이'라 불렀다. 물건을 심하게 실어서 산모양을 이루면 '산(山)배'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물물교환의 대종은 해안의 소금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지역에 염창(鹽倉)이 있었다. 소금과 바꾸는 육지에서의 농산물로는 콩이 대세였다. 조정에서는 주요 나루터 곳곳에서 염세(鹽稅)를 받아갔다. 평창 등 강원도의 콩인 백태와 적태는 경기도 장단콩과 함께 최고의 품질로 인정되었다. 콩은 소금, 어물, 잡화 등과의 물물교환의 최고 산품이었다.

콩은 지금도 그러하듯 콩나물, 두부, 된장, 간장, 콩기름의 기본 원료로 모든 가정에서 필수품이었다. 포구에는 객주와 주막이 다수 있었다. 객주는 여관과 물물교환소 제공을 했다. 객주와 주막이 함께 하는 경우도 많았다. 1908년 자료에 의하면 객주 수는 문막에 5~10호 정도였는데 남한강의 여주, 장호원 등지에는 10~20호 정도였다.

소금을 실은 소금배(鹽船)는 배 위에서 직접 소금과 콩 등 농산물을 교환했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 시대인 1770년 무렵 소금과 콩의 교환비율은 말 단위로 1대 2였다. 물론 상류로 갈수록 소금값이 비싸졌다. 1890년에는 교환 단위가 1대 1이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값싼 염전염인 호염(胡鹽)이 유입된 결과였다. 1948년에는 소금배 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개설된 신작로를 통한 육지 운송 때문이었다.

남한강 유역의 시장 분포를 보면 평창에는 1770년대부터 1905년까지는 3개였고,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는 강릉과 통합하여 시장이 5개가 되었다. 평창에서 가장 큰 시장은 대화장이었다. 대화장은 관동대로에 입지한 영서의 중심시장으로 강릉, 원주, 횡성, 평창과 육로로 연결되어 동해안, 영서, 남한강 유역의 유통 산물들이 모였다.

평창의 인구는 18세기 말(정조 시대) 1100명, 1907년에는 1만2100명이었다. 당시 충주가 19세기 말 1만2000명, 1907년 1만2300명인 것을 보면 평창의 인구는 100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에 조선에서는 인구 이동이 많았다. 강원도 산간은 대표적 피거지(避居地)였다.
예를 들면 당쟁에 패배한 양반층, 농토를 잃은 농민,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한 평민, 박해를 피하고자 했던 천주교도 그리고 정감록 신봉자, 포도청에 쫓기는 주민 등 다양한 형상으로 강원도 산간지역으로 모였다.

이들은 화전농, 담배농, 땔감 수집, 도자기 굽기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가계를 유지했다.
현재는 첨단 고랭지 농업, 다양한 목축업 등과 함께 피서와 스키장 등 관광산업 단지가 발달해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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