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다시 살아난 핵전쟁의 망령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8.15 18:05

수정 2024.08.15 18:46

박종원 국제부 기자
박종원 국제부 기자
지구상에서 공식적으로 폭발한 마지막 핵폭탄은 북한이 2017년 6차 핵실험에 사용한 1.5메가톤(1Mt·TNT 폭약 100만t 위력) 규모의 폭탄이었다. 냉전시대 핵무기 경쟁을 벌였던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1992년, 1990년 이후 핵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약 30년에 걸친 정적은 깨지기 직전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년 넘게 이기지 못한 러시아는 이달 우크라에 본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유엔 주재 러시아 차석대사는 13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관대한 평화 제안은 이제 없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지난해 7월 "우크라가 러시아 영토를 점령하면 핵무기 사용 외에는 출구가 없다"고 주장했다. 푸틴 역시 지난 6월 핵무기에 대해 "서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러시아가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며 "주권과 영토를 위협한다면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푸틴이 우크라에 핵공격을 가할 확률은 낮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개전 이후 꾸준히 푸틴에게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친정부 싱크탱크인 외교국방정책위원회는 지난 5월 푸틴에게 "전투 목적이 아닌 시범 차원의 핵폭발"로 러시아의 의지를 보이자고 건의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13일 공개한 러시아군 기밀문서에도 "적대적인 위협이 임박한 상황"에서 서방에 겁을 주는 용도로 외진 곳에서 핵무기를 터뜨리는 '시범 타격'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만약 러시아가 인명피해 없이 핵폭발을 일으킨다면 미국이 겁을 먹을까? 미국의 핵탄두는 지난해 9월 기준 3748개로 1967년 최대치(3만1255개) 대비 88% 줄었으며 러시아 추정치(4380개)보다 적다. 미국 의회는 지난해 10월 바이든 정부에 러시아·중국에 대비해 핵무기 생산을 늘리라고 권했다. 지난 5월 네바다주에서는 핵반응 직전에 멈추는 핵실험까지 진행됐다. 11월 미국 대선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고위 참모는 지난달 기고문에서 트럼프 재집권 이후 실제로 터뜨리는 핵실험을 재개하자고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몽둥이를 꺼낸다면 굶주린 맹수를 되레 자극할 뿐이다. 중국 등 다른 핵보유국도 핵탄두를 늘릴 구실을 놓칠 리 없다.
반세기 전에 핵무기 경쟁이라는 링에서 두 거인의 단독 경기를 지켜봤던 인류는 이제 고삐 풀린 태그 매치를 보게 될 참이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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